리지 경제학

그림 이야기

렘브란트의 도살된 소에 눈 못 떼는 관객, 썩어 없어질 내 몸을 마주한다

관객은 밀어내고 싶은 사체와 자기 몸이 죽음과 부패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사실에 붙들린다.

박정우 작가

아브젝트 아트4분

Illustration by Gemini

혐오스러운 대상을 보면서도 눈길을 떼기 어려운 까닭은 무엇일까요. 1655년 렘브란트 판 레인이 그린 "도살된 소"를 보면 이 질문을 생각하게 됩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이 그림에는 가죽이 벗겨진 소의 사체가 등장합니다. 어두운 정육점 안에서 가로대에 거꾸로 매달린 소의 사체가 화폭을 가득 채우는데요. 벌어진 몸통에는 붉은 살점과 누런 지방이 드러나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성경의 거룩한 이야기나 귀족의 화려한 초상 대신 도살된 소를 화면에 크게 그렸습니다.

렘브란트 판 레인의 "도살된 소"(1655년). 루브르 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이 그림을 보며 느끼는 불편함과 묘한 매혹은 아브젝션, 곧 비체의 경험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1980년 저작 "공포의 권력"에서 정체성과 질서를 뒤흔들고 안과 밖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대상에 주목했습니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을 흐리고 사회적 금기를 침범하는 물질 때문에 깊은 혐오와 공포를 느낀다는 분석이죠.

크리스테바가 꼽은 가장 극단적인 비체는 사체입니다. 배설물이 몸이 밖으로 내보낸 물질이라면 사체는 한때 살아 숨 쉬던 주체 자체가 생명 없는 사물이 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사체를 마주할 때의 공포는 죽은 대상을 보는 불쾌감에 그치지 않아요. 살아서 생각하는 나 역시 언젠가 썩어 없어질 물질이라는 사실을 마주하면 생명과 죽음을 나누는 경계마저 확신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그 불편한 대상에서 눈길을 떼지 못할까요. 크리스테바는 사람이 비체를 배척하면서도 자신에게서 완전히 떼어낼 수 없기에 매혹과 혐오를 함께 느낀다고 설명합니다. 관람객이 사체를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밀어내려 해도 살아 있는 자기 몸 역시 죽음과 부패를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에서 렘브란트의 그림을 읽으면 관람객은 눈앞의 살점을 외면하고 싶어 하면서도 자기 몸이 그 살점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볼 수 있어요.

렘브란트가 그린 도살된 소의 형상은 20세기 표현주의 화가 하임 수틴의 작품으로 이어졌습니다. 수틴은 파리의 작업실에 도살장에서 사 온 소의 사체를 통째로 매달아 놓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고기가 부패해 냄새가 나자 이웃들이 당국에 신고할 정도였는데요. 수틴은 마르는 고기 위에 신선한 피를 다시 발라가며 살점의 붉은빛과 부패한 고기의 색채를 캔버스에 담았습니다.

하임 수틴의 "소의 도살체"(1926년). 미니애폴리스 미술관 소장. 위키피디아

수틴의 그림에서는 격렬한 붓질로 표현된 죽은 소의 살점에 생명과 죽음이 뒤엉켜 있습니다. 죽은 몸에 움직임이 남은 듯한 표현은 관람객이 살아 있는 육체와 죽은 물질을 선명하게 구분하기 어렵게 한다고 읽을 수 있지요. 두려운 대상을 작업실에 들여놓고 그림으로 옮기는 예술가의 행위에는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합니다. 크리스테바는 예술가가 비체에 몰입해 이를 작품으로 표현하는 일을 시적 카타르시스와 연결했습니다. 예술가는 불순하고 두려운 대상을 조형 언어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그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설명이에요.

그런데 사체를 그림으로 옮기는 데서 나아가 실제 사체와 피를 작품에 사용하면 어떨까요. 1960년대 빈 액셔니즘의 헤르만 니치는 동물 사체와 피를 사용하는 의식 형태의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공연으로 여러 차례 재판을 받고 수감되기도 했지요. 사체를 재현한 그림에서 느끼던 불편함이 실제 신체 물질을 사용하는 행위를 둘러싼 문제로 넓어진 것입니다.

테이트 미술관은 아브젝트 아트를 신체와 그 기능을 통해 청결함과 품위에 대한 감각을 거스르는 미술로 설명합니다. 1993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은 "아브젝트 아트: 미국 미술에서의 혐오와 욕망" 전시를 열어 이 흐름을 본격적으로 조명했습니다. 깔끔하게 정돈된 전시 공간에 사회가 숨기려던 신체 물질과 오물, 훼손된 신체의 파편이 등장했어요. 관람객은 불쾌감을 주는 이 대상들을 통해 인간 신체가 얼마나 연약한지, 어떤 본능이 억압돼 있는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작품이 드러내는 신체의 모습은 일상에서 고기를 접하는 방식과도 거리가 있습니다. 대형 마트의 정육 코너에서는 소고기를 흡수 패드에 받치거나 진공 포장해 판매합니다. 도살 과정의 소리와 냄새, 가죽이 벗겨진 사체의 모습은 위생 처리와 포장을 거친 상품에서 찾아보기 어렵지요. 고기를 소비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동물의 사체라는 사실은 쉽게 눈에 띄지 않게 됩니다.

일상에서 보이지 않게 된 신체의 모습은 대중문화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신체가 기괴하게 뒤틀리고 장기가 쏟아져 나오는 바디 호러 영화나 좀비물은 혐오와 공포를 일으키면서도 관객의 시선을 끕니다. 크리스테바의 관점에서 보면 관객은 화면 속 훼손된 몸을 밀어내면서도 자기 몸이 그 몸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렘브란트의 소 사체와 수틴의 뒤틀린 살점에서 읽었던 관계를 호러 영화의 화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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