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신탁회사 뱅크런과 모건의 사적 구제, 미국 중앙은행을 낳다
위기 때 현금 공급을 개인 결단에 의존하던 취약점을 메우려 공적 최종대부자인 연방준비제도를 출범시켰다

119년 전 오늘인 1907년 10월 22일 미국 뉴욕의 니커보커 신탁회사에는 예금을 찾으려는 고객들이 몰렸습니다. 34번가와 5번가 모퉁이에 있는 본점에 인출 행렬이 늘어서자 니커보커는 현금을 실어 왔지만 고객들의 인출 요구를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약 3시간 동안 800만달러가 빠져나간 뒤 낮 12시 30분 준비한 현금이 바닥나면서 창구에서 예금 지급을 중단했어요. 뉴욕 3위 신탁회사의 영업 중단을 계기로 금융공황이 본격화했습니다.
니커보커는 240만달러의 신규 자본을 확충한 뒤 이듬해인 1908년 3월 영업을 재개했고 이후 모든 예금자에게 원금과 이자를 전액 지급했습니다. 하지만 영업 중단 직후 예금 인출 사태는 다른 금융회사로 번졌고 증시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 회사의 현금 고갈이 금융시장 전체를 흔든 이유를 알려면 당시 신탁회사들이 어떻게 예금을 모아 운용했고 위기 때 어디서 자금을 구할 수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탁회사는 개인과 기업이 맡긴 자산을 관리하고 운용하는 금융회사입니다. 20세기 초 뉴욕의 신탁회사들은 수수료를 받는 자산 관리 업무를 넘어 일반 상업은행처럼 고객이 언제든 찾을 수 있는 요구불예금을 받고 당좌대출도 취급했습니다. 높은 수익을 기대하며 상업은행과 다름없는 업무로 영업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는데요. 상업은행과 마찬가지로 예금을 받으면서도 현금을 얼마나 남겨둬야 하는지는 크게 달랐습니다.
국법은행법의 규제를 받는 상업은행인 국법은행은 뉴욕 같은 중심도시에서 예금의 25%를 현금 지급준비금으로 보유해야 했습니다. 반면 뉴욕주 법에 따라 설립된 신탁회사의 법정 현금 지급준비율은 5% 안팎이었습니다. 같은 규모의 예금을 받아도 신탁회사는 현금으로 남겨두는 비중이 작아 더 많은 돈을 운용할 수 있었죠. 신탁회사들은 이를 바탕으로 상업은행보다 높은 예금 금리를 제시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상업은행에 맞먹는 자산을 운용하는 대형 금융사로 성장했습니다.
신탁회사들이 모은 돈은 뉴욕 증시의 투기적 거래를 위한 대출에도 쓰였습니다. 신탁회사들은 주식 중개인들에게 담보 없이 하루 동안 거액을 빌려주는 당일 대출과 단기 콜론을 적극적으로 제공했습니다. 중개인들은 무담보 대출로 주식을 산 뒤 그 주식을 담보로 상업은행에서 야간 대출을 받아 신탁회사에 빚을 갚았습니다. 중개인들은 신탁회사에서 빌린 돈을 상업은행 대출로 갚는 방식으로 주식 거래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했던 것이죠. 신탁회사는 이 과정에서 월가 주식시장에 대규모 자금을 공급했습니다.
영업 규모는 커졌지만 니커보커를 비롯한 신탁회사 대부분은 위기에 대비한 공동 지원 체계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뉴욕 어음교환소는 위기가 닥치면 회원 은행에 대출을 제공하고 회원 간 결제에 쓸 수 있는 대출증서를 발행해 지원했습니다. 신탁회사도 1903년 가입할 기회가 있었지만 수표 결제 업무가 적어 교환소 이용에 따른 이익보다 현금 준비금 요건에 따른 부담이 크다고 판단해 가입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교환소에 가입하지 않은 신탁회사는 회원 은행이 받는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당시 미국에는 비상시 자금을 공급할 공식 중앙은행도 없었습니다.
위기 때 지원을 받을 수 있느냐의 차이는 구리 투기 실패 이후 드러났습니다. 투기꾼 F. 오거스터스 하인즈와 찰스 W. 모스는 유나이티드 카퍼 주식을 대량 매수해 공매도 세력을 압박하는 방식으로 시세를 조종하려 했지만 10월 16일 실패했습니다. 주가가 폭락하자 하인즈가 이사로 있던 머칸타일 국법은행 등 관련 은행들로 예금 인출 사태가 번졌습니다. 어음교환소는 하인즈와 모스를 경영진에서 물러나게 하는 조건으로 회원 은행들에 자금을 지원해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하지만 신탁회사는 이런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10월 18일 니커보커의 찰스 바니 사장이 모스와 동업 관계였다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신탁회사 예금자들도 불안해하기 시작했습니다. 10월 21일 내셔널상업은행이 니커보커를 대신해 교환소에 대출을 요청했지만 니커보커가 비회원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니커보커 이사회가 바니 사장을 해임한 그날 오후, 결제를 대행하던 내셔널상업은행은 다음 날 아침부터 수표 결제 대행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니커보커는 경영진을 교체하고도 예금자들의 불안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수표 결제 대행마저 중단될 상황에 놓인 것이죠.
10월 22일 니커보커가 지급 중단을 선언하자 공포는 시장 전반으로 퍼졌습니다. 당일 뉴욕증권거래소의 주식 담보 콜금리는 연 9.5%에서 70%로 치솟았고 이틀 뒤에는 100%에 이르렀습니다. 주식 거래에 필요한 단기 자금을 구하는 비용이 급격히 높아진 것이죠. 중개인들이 자금을 구하지 못하면서 주가가 폭락했고 뉴욕 2위 신탁회사였던 아메리카신탁회사와 링컨신탁회사 창구에도 예금을 찾으려는 줄이 늘어섰습니다. 대량 인출 사태는 지방 은행들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금융 시스템이 마비되자 칠순의 민간 금융가 J.P. 모건이 수습에 나섰습니다. 모건은 매디슨가 36번가에 있는 자신의 도서관에 주요 은행장들과 신탁회사 대표들을 소집했습니다. 조지 코텔류 재무장관도 뉴욕으로 와 연방 자금 2,500만달러를 국법은행에 예치했습니다. 모건은 신탁회사 대표들을 서재에 모아 자정 무렵까지 설득한 끝에 아메리카신탁회사에 825만달러를 지원할 차관단을 결성했습니다. 10월 24일에는 증시 폐쇄를 막으려고 은행장들을 설득해 약 2,500만달러의 긴급 지원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예금 인출에 대응할 돈과 주식 거래를 계속할 돈을 긴급히 마련한 것이죠.
재무부의 지원과 민간 금융가의 자금 동원으로 공황은 수습됐지만 미국 사회는 그 과정에서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계 최대 산업국의 금융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민간 금융가 개인의 판단과 사적 친분에 기댄 자금 동원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모건이 은행장들을 설득해 돈을 모은 성과와 별개로 위기 때 현금을 공급하는 일을 개인의 결단에 의존해야 한다는 취약점은 남아 있었죠.
의회는 1908년 5월 올드리치-브릴랜드법을 통과시키고 넬슨 올드리치 상원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화폐위원회를 발족했습니다. 위원회는 유럽 각국의 중앙은행 제도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조사와 논의를 거쳐 1913년 12월 23일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서명한 법률이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입니다. 미국은 전국 12개 연방준비은행으로 이루어진 중앙은행 체계인 연방준비제도(Fed)를 출범시켰습니다. 경직된 통화 공급 구조를 보완해 신용을 탄력적으로 공급하고 위기 때 금융기관의 상업 어음을 할인해 현금을 제공하는 공적 최종대부자의 역할을 법으로 정한 것이죠.
오늘날 연준의 할인창구(discount window)에서는 예금을 받는 금융기관이 대출채권과 증권 등을 담보로 맡기고 자금을 빌릴 수 있습니다. 시장에서 돈을 구하기 어려워졌을 때 금융기관이 대출을 급히 줄여 가계와 기업에까지 충격을 전하는 일을 완화하려는 장치입니다. 1907년 모건이 다른 금융회사들을 설득해 모았던 비상 자금을, 이제는 정해진 담보와 대출 요건을 갖춘 금융기관이 중앙은행에 요청할 수 있는 상설 통로가 마련돼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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