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세상의 흐름

모두가 404를 만났지만 402를 본 사람은 없었다

웹 표준이 28년 동안 비워둔 결제 코드에 첫 손님이 도착했다...잔치가 끝난 자리에 남은 것은 1달러 미만의 거래들

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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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ration by Gemini

인터넷을 써 본 사람치고 404를 못 만난 사람은 없다. 링크는 끊어지고 문서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404 Not Found는 웹에서 가장 유명한 숫자가 됐고 티셔츠에 박히며 농담에도 쓰인다. 그런데 웹 통신 규약을 정리한 표준 문서에는 그 2칸 앞에 만들어진 지 28년이 되도록 실물을 본 사람이 거의 없는 코드가 하나 있다. 402, Payment Required. 돈을 내야 보여준다는 뜻이다. 1997년의 표준 문서는 이 코드에 딱 한 줄을 달아 두었다. "이 코드는 미래의 사용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

예약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웹을 만든 사람들은 처음부터 웹에 계산대가 생길 것으로 믿었다. 신문 기사 1편에 10원, 사진 1장에 5원을 내고 지나가는 세상이다. 1990년대에 그 믿음에 돈을 건 회사들이 줄줄이 나왔다. 디지털 현금을 만든 디지캐시는 1998년에 파산했고 컴퓨터 회사 DEC가 만든 소액결제 시스템 밀리센트는 상용화 문턱을 넘지 못했으며 웹 표준화 기구가 꾸린 소액결제 작업반은 표준을 내지 못하고 해산했다. 402는 그대로 빈방이 됐다.

첫 번째 패인은 흔히 수수료로 꼽힌다. 카드 결제는 매 건 정률 수수료에 건당 고정비가 추가로 붙는다. 미국 기준으로 건당 10~30센트다. 1센트짜리 기사를 팔수록 적자가 쌓이는 구조에서 소액결제는 셈법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다.

그런데 더 치명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다. 사람의 주의력이다. 암호학자 닉 서보는 1999년에 이렇게 정리했다. 아무리 싼 결제라도 살까 말까를 판단하는 정신적 비용은 줄어들지 않는다. 기사 1편에 10원이라도 클릭할 때마다 "이 글이 10원어치인가"를 저울질해야 한다면 뇌는 금세 지친다. 그가 붙인 이름은 정신적 거래 비용이다. 결국 시장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둔 쪽은 구독이었다. 한 달에 1번만 결정하게 해 주는 요금제, 곧 결정을 묶음으로 파는 상품이다. 넷플릭스와 스포티파이의 전성기는 그렇게 열렸다.

그 뒤로 28년 동안 402는 비어 있었다. 그런데 작년부터 이 방에 불이 켜졌다. 웹의 사정이 바뀐 탓이 아니다. 손님이 바뀌었다.

웹 생태계에는 오래된 대타협이 하나 있다. 검색엔진이 내 페이지를 마음껏 긁어가는 대신 검색 결과로 방문자를 보내준다는 거래다. 이 거래가 무너지고 있다. 콘텐츠 전송망 회사 클라우드플레어의 작년 여름 집계를 보면 구글은 페이지를 14번 긁을 때 방문자 1명을 돌려보냈다. 오픈AI는 1,700번에 1명, 앤스로픽은 73,000번에 1명이었다. 인공지능이 원문을 읽고 요약해 주면 사람은 원문에 올 이유가 없다. 긁어가기만 하고 아무도 돌려보내지 않는 손님 앞에서 공짜로 열어 두던 빗장을 걸어 잠그는 곳이 늘기 시작했다.

동시에 반대편에서 새 손님이 나타났다. 사람 대신 검색하고 예약하고 구매하는 인공지능 에이전트다. 이 손님은 결제 창 앞에서 번번이 멈춰 선다. 카드번호 입력란과 보안문자는 애초에 사람인지 확인하려고 만든 문이라 기계는 통과할 수 없도록 설계돼 있다. 구독도 답이 아니다. 에이전트는 특정 사이트를 한 달씩 정기 구독하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문서 1장 값을 그 자리에서 결제하고 지나가야 한다. 파는 쪽은 문을 닫아걸고 싶고 사는 쪽은 결제할 계산대가 없다.

x402는 이 자리에 나온 규약이다. 2025년 5월 코인베이스가 공개했고 이름부터 그 빈방의 호수에서 따왔다. 작동 원리는 싱겁도록 단순하다. 에이전트가 문서를 요청하면 서버가 402와 함께 가격표를 돌려준다. 얼마를 어느 지갑으로 보내라는 정보다. 에이전트는 달러 가치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으로 서명한 결제 정보를 요청 헤더에 얹어 같은 문을 다시 두드린다. 서버가 결제를 확인하면 그제야 200 신호와 함께 문서가 열린다. 회원가입도 카드번호 입력도 없이 단 2번의 요청으로 끝난다. 수수료는 1센트가 안 되고 정산은 수 초 만에 끝난다. 1997년의 셈법을 무너뜨렸던 건당 10~30센트 고정비가 이 구조에는 없다. 출범에는 아마존웹서비스, 앤스로픽,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서클이 이름을 올렸고 그해 9월에는 구글이 60여 회사와 만든 에이전트 결제 규약 AP2가 x402를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열풍이 먼저 불어닥쳤다. 작년 10월 x402 거래는 1주 만에 100배로 뛰었다. 이 규약으로 발행된 토큰 핑(PING)은 첫 달에만 15만 건을 기록했고 연말에는 하루 정산액이 100만 달러에 다가섰다. 하지만 장부를 들여다보면 그 몸통은 투기였다. 토큰 매수 주문과 에어드롭을 노려 지갑 수를 부풀린 허수 거래가 뒤엉켰다. 낯선 풍경은 아니다. 철도망이 깔릴 때도 닷컴 열풍이 불 때도 투기 자금은 늘 인프라보다 앞서 달렸다.

올해 들어 숙취가 찾아왔다. 하루 정산액은 연초 대비 93% 급감해 이달 현재 주평균 4만 달러대다. 잔치가 끝났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같은 장부의 다른 지표는 다르게 움직였다. 거래 건수는 작년 12월 한 달 485만 건에서 올해 5월 289만 건으로 정산액 폭락세에 비하면 완만하게 줄었고 누적으로는 1억 건을 넘겼다. 투기 자금은 빠졌지만 실제 발길은 남은 셈이다. 판돈 큰 투기판이 걷힌 자리에서 1달러 미만 결제들이 초당 수십 번씩 계산대를 두드리고 있다. 데이터 조회 1회, 제재 대상 확인 1회, 신용 조회 1회. 서보가 예견한 손님이 진짜 찾아왔다는 증거는 장부의 초라한 소액 결제 줄에 또렷이 적혀 있다.

제도권 거물들도 자리에 앉았다. 올해 4월 이 규약은 리눅스재단 산하 x402 재단으로 들어갔다. 창립 회원 40곳에는 아마존웹서비스와 구글, 클라우드플레어를 비롯해 비자, 마스터카드,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스트라이프가 포진했다. 건당 10~30센트 수수료로 소액결제를 막아 온 카드사들이 자기 요금표를 우회하는 배관의 이사회에 직접 앉은 셈이다. 6월에는 아마존웹서비스가 자사 콘텐츠 전송망에 x402를 심었고 7월 1일 클라우드플레어는 웹페이지, API, 데이터셋 어디에든 가격을 매기고 x402로 정산해 주는 수익화 관문을 열었다. 작년에 "데이터를 긁으려면 돈을 내라"며 크롤러에만 받던 통행료를 이제 모든 손님에게 받아 주겠다는 선언이다.

그래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물음은 3가지다. 첫째, 계산대는 손님과 상점이 함께 있어야 열린다. 문지기가 계산대를 대신 놓아 주는 시대가 됐으니 남은 쪽은 손님이다. 전자지갑을 쥔 에이전트가 하루 4만 달러 수준을 넘어 그 1000배를 결제하는 날이 과연 올 것인가. 둘째, 기계에게 지갑을 온전히 맡겨도 되는가. 에이전트가 밤새 엉뚱한 결제를 저질렀을 때 그 청구서는 누구 몫인가. 구글의 AP2가 결제마다 사람이 서명한 위임장과 한도를 붙이도록 설계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셋째, 이 계산대의 화폐가 달러 스테이블코인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은 지난해 7월 스테이블코인 법을 만들어 길을 열었다. 뒤집어 보면 지금 이대로는 세계의 기계 손님들이 달러로 계산하는 법부터 배운다.

그럼에도 이번 시도가 지난 3차례의 실패와 다른 결정적 이유가 있다. 30년 실패의 진짜 교훈이 수수료보다 인간의 주의력 한계에 있었다면 주의력 제약이 없는 손님의 등장은 전제 자체가 통째로 뒤바뀐 일이다. 서보가 말한 정신적 거래 비용이 정확히 0인 손님은 역사상 처음이다. 에이전트는 10원짜리 결정을 초당 1000번씩 내려도 지치지 않고 구독으로 결정을 아낄 이유도 없다. 마침내 소액결제를 가로막던 단 하나의 병목이 계산대 앞에서 사라진 것이다.

한국 신문에서 x402를 검색하면 아직 0건이다. 그런데 재료는 이미 지면에 다 나와 있다. 네이버는 2월에 내놓은 인공지능 쇼핑 에이전트를 지난달 정식 서비스로 전환했고 신한카드는 스테이블코인 결제·정산 6개 과제의 검증을 마치고 비자, 마스터카드와 공동 시험에 들어가며 에이전트 결제 실증까지 벌여 놓았다. 비씨카드는 외국인 관광객용 스테이블코인 QR 결제를 준비한다. 정작 이 모든 실험이 올라설 법적 기반은 아직 없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에 들이는 디지털자산기본법은 발행 주체를 누구로 할지를 두고 1년째 국회에 멈춰 서 있고 다음 달 정기국회가 분기점으로 꼽힌다. 사람 결제에서 세계에서 가장 빠른 나라가 기계 손님용 계산대에서는 어느 화폐로 줄을 설지 아직 정하지 못한 셈이다.

그러니 지금 지켜볼 진짜 지표는 반짝했던 토큰 가격이나 하루 정산액에 있지 않다. 조용히 쌓여가는 1달러 미만 거래 건수, 그리고 402를 돌려주는 서버의 숫자다. 그 2개 숫자가 멈추면 이번에도 잔치로 끝나겠지만 계속 늘어난다면 웹은 1997년에 설계도에만 그려 두었던 계산대를 29년 만에 비로소 여는 것이다.

표준 문서는 402를 "미래의 사용을 위해" 예약해 두었다. 그 미래가 도착하는 데 한 세대가 걸렸는데 막상 와서 보니 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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