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기술과 과학

파산한 항공사의 장부에 없던 데이터가 141억원에 팔렸다

이메일 1억 통과 고객센터 녹취 3,000만 통이 경매에...재무제표에는 한 줄도 없던 자산

리지

2

Illustration by Gemini

미국 저비용항공사 스피릿은 2020년 코로나로 적자에 빠진 뒤 회복하지 못하고 지난 5월 비행기를 모두 세웠다. 빚을 갚으려 자산을 경매에 부쳤는데, 최근 법원에 제출된 서류를 보면 낙찰 목록에 비행기도 슬롯도 아닌 항목이 끼어 있었다. 회사가 영업하며 쌓아둔 데이터 한 덩어리다. 장부에 오른 적 없던 이 자산에 구글이 1,000만달러, 우리 돈 141억원을 냈다.

이메일 1억 통, 고객센터 녹취 3,000만 통, 채팅 기록 1,500만 건이 여기 담겼다. 협업 도구에 남은 항목만 5억 건이고, 마케팅 시스템의 이메일 주소 1,370만 개가 따라붙었다. 운항 76만 3,000편과 급유전표 120만 장, 부품 구매 78만 7,452건의 내역도 함께 넘어갔다.

이런 기록에 가격이 매겨진 이유는 차순위 응찰자를 보면 드러난다. 인공지능 학습용 데이터를 파는 회사였다. 범용 거대모델보다 특정 분야를 깊게 학습한 소형 모델이 낫다는 쪽으로 시장 무게중심이 옮겨가자, 해당 분야의 실무 기록을 사려는 수요가 붙었다. 구글은 인공지능 서비스에 쓰려고 샀다고 밝혔고, 낙찰가는 두 회사가 맞붙으며 치솟았다.

그런데 이 자산은 스피릿의 재무제표 어디에도 없었다. 회계 기준이 자체 구축한 고객 명부나 데이터를 자산으로 올리지 못하게 막는 탓이다. 외부에서 사들인 취득원가가 없으니 장부에 적을 금액도 없다는 논리다. 적자가 쌓이고 청산가치를 따지는 내내 장부가액은 0원이었고, 아무도 자산이라 부르지 않았다. 경매장에 나와서야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았다.

팔린 품목이 사람의 말과 기록인 만큼 복잡한 절차가 따랐다. 법원 서류에 따르면 데이터는 제3의 비식별 처리 대행사를 거친다. 그 대행사는 구글이 고르고 비용도 댄다. 기준은 캘리포니아주 소비자 개인정보보호법의 비식별 요건이다. 처음에는 고객 명부를 달라는 응찰도 있었지만, 1차 경매에서 유력 응찰자들은 "개인식별정보를 제외한 자산 목록"에 입찰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름을 지운다고 기록이 무해해지는 것은 아니다. 구매자 이름은 지워도 특정 식별번호가 무엇을 언제 결제했는지는 남아 개인을 묶어낼 수 있다. 기내 와이파이 판매 내역 1,100만 건에 높은 평가가 매겨진 이유다. 구글은 개인정보가 나오면 지우겠다고 밝혔지만, 그 약속은 데이터가 넘어간 뒤에야 검증된다.

국내에도 비슷한 창고를 가진 기업이 많다. 항공사와 통신사, 카드사가 수십 년 치 고객센터 녹취와 결제 기록을 쌓아두고 있다. 하지만 어느 것도 재무제표에 자산으로 잡혀 있지 않으며, 회사가 문을 닫기 전에는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일도 없다. 개인정보 보호법은 가명정보를 통계와 연구에 한해 동의 없이 쓰게 열어두었고, 기업 간 결합은 지정 전문기관을 거치도록 했다.

국내 상장사의 몸값을 매길 때도 이 자산은 빠져 있다. 주가순자산비율의 분모인 순자산은 부동산과 설비, 현금만 따진다. 데이터가 두터운 기업도 얇은 기업과 같은 배수로 묶이는 이유다. 저평가를 논할 때 잣대로 삼는 장부가액이 무엇을 빠뜨렸는지 물어야 한다.

141억원은 비행기를 다 세우고 흥정할 힘까지 빠진 회사가 마지막에 받아낸 액수다. 멀쩡히 영업하는 기업의 창고에는 아직 아무도 가격표를 붙이지 않았다.

이 글이 어땠나요?

눌러 주시면 다음 글을 쓸 때 소중한 참고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