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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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은 망하고 마차만 남았다, 버스라는 이름의 시작

낭트 모자점 간판에서 이름 따와...1861년 법 한 줄에 증기버스는 30년간 자취 감춰

리지

버스2분68점

Illustration by Gemini

"모두에게 모든 것을(Omnes Omnibus)." 1823년 프랑스 낭트의 한 모자점 간판에 라틴어로 적힌 문구였다. 가게 주인 성이 옴네스라는 점에 착안한 말장난이었다. 가게 앞에 서던 승합마차가 간판 문구를 그대로 이름으로 삼았다.

마차 주인은 낭트 교외 리슈부르에서 제분소를 운영하던 스타니슬라스 보드리였다. 제분소에서 나오는 온수가 아까워 곁에 목욕탕을 열었지만 손님이 들지 않았다. 시내 한복판에서 목욕탕까지 승객을 실어 나르는 마차를 투입했다.

사업은 성공했지만 보드리가 의도한 방향과는 달랐다. 마차는 붐볐지만 승객 대부분은 목욕탕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는 제분소와 목욕탕을 정리하고 마차 사업만 남겼다. 낭트 사람들은 그 마차를 옴니뷔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828년 4월 보드리는 파리로 진출해 첫 노선을 열었다.

말 옴니버스는 곧 맨체스터와 런던으로 퍼졌다. 1833년 4월 22일에는 증기 동력을 갖춘 옴니버스가 런던 시내에 처음 등장했다. 증기버스는 말보다 빠른 데다 운영비가 적게 들고 잘 뒤집히지도 않았다. 바퀴 폭이 넓어 도로 훼손도 적었다.

런던 홀본 고가교를 처음 건넌 말 옴니버스. 위키피디아

하지만 유료도로를 관리하던 조합들이 증기차에 과중한 통행료를 물렸다. 1861년 기관차법(Locomotive Act)은 도로를 달리는 기관차의 속도를 시내 시속 8km, 시외 시속 16km로 제한했다. 이 규제 하나로 동력차는 영국 도로에서 30년 가까이 자취를 감췄다. 그 빈자리를 말 옴니버스 업체들이 차지했다.

그 공백기 동안 차세대 동력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전기를 동력으로 삼은 기술이었다. 1881년 윌리엄 지멘스는 학회지에 이런 구상을 실었다. "레일 위를 달릴 필요 없이 전류를 차에 보냈다가 발전기로 되돌릴 수 있다." 이듬해 동생 베르너 폰 지멘스가 베를린 할렌제에서 엘렉트로모테라는 차를 선보였다. 지금 트롤리버스라 부르는 교통수단의 기술 요건을 두루 갖춘 차였다. 하지만 시연이 끝난 뒤 곧바로 해체됐다.

200년이 흐른 지금 한국에 등록된 버스는 4만 9,465대다. 2015년 4만 8,573대와 큰 차이가 없다. 반면 시외버스는 그사이 7,144대에서 5,163대로 감소했다. 고속버스 승객도 2010년 3,820만 명에서 2023년 2,041만 명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대신 마을버스 노선은 931개에서 1,897개로 두 배 늘었다. 긴 노선을 내주고 짧은 구간으로 되돌아왔다. 보드리가 손님에게 판 상품도 다르지 않았다. 시내에서 교외로 이어지는 짧은 구간이 사업의 핵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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