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야기
8m 복도가 37m로 보이는 궁전, 바로크는 그렇게 시작했다
종교개혁에 맞서 감정에 호소하라는 공의회 결의에서 출발...찌그러진 진주라는 조롱이 정식 사조로 정착

로마 스파다 궁전 중정에는 회랑이 들어서 있다. 기둥이 늘어선 통로 끝에는 조각상이 서 있다. 이 회랑은 언뜻 보면 길이가 37m에 이르는 긴 복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길이는 8m에 지나지 않는다. 끝에 선 조각상도 어른 키처럼 보이지만 실제 크기는 60cm에 불과하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기둥이 낮아지고 바닥이 서서히 솟아오르는 착시를 유도한 설계 때문이다. 17세기에 이 착시를 설계한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는 정밀한 계산을 위해 수학자의 도움을 받았다.
이런 시각적 착시 기법을 도입한 공간은 그 시절 로마에 적지 않았다. 당시 로마의 성당들은 특히 천장을 활짝 틔운 듯 연출했다. 천장 회벽 틀 안쪽에 푸른 하늘을 그리고 천사와 성인을 가득 채웠다.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신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원근을 치밀하게 계산했다. 신자들이 고개를 들었을 때 막힌 지붕 대신 천국의 광경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이런 공간 변화는 단순한 예술적 취향 차이에 머물지 않았다. 시대의 흐름을 바꾼 이 양식은 가톨릭교회의 공의회에서 태동했다. 가톨릭교회는 1545년부터 18년에 걸쳐 트리엔트 공의회를 열고 종교개혁에 맞설 대응책을 마련했다. 다만 초기 대응은 지나치게 엄격하고 추상적인 교리의 틀에 갇혀 있었다. 소수 지식인은 이 교리를 이해했지만 성당을 메운 일반 대중은 쉽게 공감하지 못했다. 결국 공의회는 노선을 수정해 예술이 종교적 주제를 직접적이고 감정적으로 전달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화가들이 마주한 과제는 대중의 마음을 강렬하게 뒤흔드는 일이었다. 이들은 르네상스의 고른 빛을 버리고 오직 1곳에만 빛을 모았다. 화면의 나머지 공간은 짙은 어둠 속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가장 정적인 장면 대신 가장 격렬한 순간을 포착해 인물의 얼굴에 감정을 생생히 담았다. 화면 구도 역시 수직이나 수평의 균형을 깨고 가파른 사선으로 과감히 기울였다. 카라바조는 캄캄한 배경 속 모델에게 단일 조명을 비춘 화폭으로 당대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하지만 정작 이 사조는 오랫동안 온전한 제 이름을 얻지 못했다. 바로크라는 명칭은 찌그러진 진주를 뜻하는 포르투갈어 바로코에서 유래했다. 1694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사전은 이 낱말을 "완전히 둥글지 못한 진주에만 쓴다"고 규정했다. 1768년 루소는 백과전서에서 바로크 음악이 "화성이 혼란스럽고 전조와 불협화음으로 가득하다"고 비판했다. 당대 평가는 비난과 혹평 일변도였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명칭은 당시 예술을 비웃던 조롱에서 출발했다.
19세기에 들어서도 이 양식에 쏟아진 평가는 차가웠다. 영국 비평가 존 러스킨은 바로크 조각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까지 강하게 비판했다. 이런 멸시의 흐름은 1888년에 이르러서야 바뀌기 시작했다. 하인리히 뵐플린이 이 양식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다룬 학술 저서를 출간했다. 그는 바로크를 "덩어리 속으로 들어온 운동"이라 정의했고 그때부터 조롱은 정식 사조로 자리 잡았다.
바로크가 극장에 남긴 대표적인 유산 가운데 프로시니엄 아치가 있다. 무대를 액자처럼 감싸 무대 뒤 기계 설비를 관객 시선에서 가려주는 장치다. 극장이 커지고 무대 장치가 복잡해지면서 이 구조는 널리 퍼졌다. 오늘날 영화관에서 불이 꺼질 때 화면을 두르는 검은 테두리가 바로 그 자취다.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베르사체의 식기와 옷을 감싸는 아칸서스 덩굴 무늬도 바로크 장식 도안에서 유래했다. 그러면서도 바로크는 지나친 장식을 비꼬는 표현으로 여전히 쓰인다. 로마 스파다 궁전 회랑 앞에는 지금도 관람객이 길게 줄을 선다. 8m에 지나지 않는 통로를 37m로 체험하려는 발길이 이어진다. 속는다는 사실을 알고도 서는 줄이니, 400년 전 그 회랑을 설계한 이의 솜씨는 지금까지도 제대로 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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