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기술과 과학

봉투 한 장에 나라마다 등록...유럽 단일시장의 뒷걸음

네 나라에 10개 팔면 연 1,150유로...27개국에 다 팔려면 처음부터 수천 개 찍어야

리지

유럽 포장재 규제2

Illustration by Gemini

유럽연합의 새 포장재 규정이 이달 12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회원국마다 제각각이던 규정을 통일하고 버려지는 포장재를 줄이겠다는 취지다. 포장재를 시장에 내놓은 사업자가 수거와 재활용 비용을 부담하는 확대생산자책임(EPR)을 뼈대로 삼았고 유럽에서 오래 지켜온 원칙인 만큼 여기까지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 흩어져 있던 규정이 하나로 통합된다니 국경 너머로 물건을 보내던 영세 판매자에게도 반가운 소식처럼 들렸다.

하지만 규정을 뜯어보면 무늬만 통합에 그친다. 등록과 신고, 수수료를 내는 창구는 27개국에 그대로 흩어져 있다.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는 사업자는 포장재가 폐기물이 되는 국가마다 개별 등록하고 보고해야 한다. 대기업에는 사업 비용의 한 줄에 불과하지만 나라마다 소량만 파는 영세 판매자에게는 사정이 전혀 딴판이다.

유럽의 소형 전자기판 장터 렉트론즈가 든 사례를 보면 그리스의 엔지니어가 25유로짜리 센서 기판을 설계해 첫해에 독일과 프랑스, 오스트리아와 벨기에 4개국에 모두 10개를 팔았을 때 그 즉시 4개국에서 포장 폐기물을 배출하는 생산자가 된다. 정전기 방지 봉투와 완충 봉투를 합쳐 1건에 50g 남짓으로 4개국에 나간 포장재를 다 모아도 500g이 되지 않는데 등록과 대리인 선임, 신고 대행에 드는 비용은 낙관적으로 잡아도 연 1,150유로에 달한다.

유럽집행위원회도 문제점을 일부 인정했다. 국가별 대리인을 두라는 요건을 2035년까지 미루자는 안이 나왔지만 아직 표결을 거치지 않았고 대리인을 제외하더라도 국가별 등록과 신고, 수수료 부담은 그대로 남는다. 관청이 봉투 10장 보낸 사람에게까지 규정을 엄격히 적용할지는 알 수 없으나 벌금은 수천 유로 단위로 정해져 있으니 판매자로서는 국경을 넘기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 장터의 거래 실태는 지극히 영세한 수준이다. 거래액의 5%를 수수료로 받되 판매자가 처음 5건을 팔 때까지는 그마저 받지 않는다. 지난 1년 동안 등록 판매자의 절반은 주문을 10건도 받지 못했다. 장터를 통째로 운영해 버는 돈이 직장인 한 사람의 월급 수준에 불과하다고 한다. 기판 10개를 만들어 동료들에게 나눠 주고 마는 사람이 절반인 곳에 국가별 등록 의무가 무겁게 지워졌다.

렉트론즈는 규정이 그대로 집행되면 판매자에게 남는 방법은 "유럽연합에서 파는 것을 그만두고 역외로만 부치는 것"이라고 밝혔다. 프랑스의 1인 사업자에게는 관세를 물더라도 이웃 독일보다 미국으로 보내는 편이 낫다는 뜻이고 그 빈자리는 아마존과 테무 같은 대형 플랫폼의 차지가 된다.

유럽연합의 토대에는 상품과 사람, 서비스와 자본이 국경 없이 오간다는 네 가지 자유가 있었다. 봉투 반 킬로그램에 물릴 환경 부담금은 몇 센트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나라마다 등록하고 계산해 신고하는 비용은 수천 유로에 이른다. 이런 고정비용은 판매량과 무관하게 발생하므로 언제나 대량 판매자의 편이고 유럽이 부족하다고 걱정해온 혁신은 10개부터 시작하는 현장에서 나온다. 집행위의 유예안이 표결에 오를 즈음이면 셈을 마친 판매자들은 이미 유럽 밖에 주소를 두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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