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백과사전

국기도 이름도 갈아입는 그림자 함대 유조선 1300여 척

노후 유조선 사들여 국기와 선박 식별번호까지 바꿔...붙잡혀도 무해통항권에 막혀 벌금만 내고 풀려나

리지

러시아 그림자 함대2분

Illustration by Gemini

2026년 1월 22일 지중해 알보란해에서 프랑스 해군 특공대가 헬기 두 대를 타고 코모로 국기를 단 유조선 "그린치"에 진입했다. 이 유조선은 보름여 전 무르만스크를 출항할 당시 러시아가 승선하지 말라고 이미 경고했던 배다. 하지만 그린치는 3주 뒤 수백만 유로를 내고 풀려나 다시 운항에 나섰다. 서방 제재를 피해 러시아가 운용하는 은밀한 그림자 선단이다.

주요 7개국(G7)과 유럽연합은 2022년 러시아산 원유에 가격 상한제를 도입했다. 이에 따라 서방 보험과 선박을 이용할 길이 막히자 러시아는 폐선 직전의 노후 유조선을 사들이는 방식을 택했다. 고철 수준이던 노후 유조선 가격이 치솟았고 배를 판 선주들은 막대한 차익을 거뒀다. 이렇게 불어난 선단 규모는 2022년 말 600척에서 이듬해 말 1,100~1,400척으로 크게 늘었다. 우크라이나 정부 집계에 따르면 올해 2월 기준 선단 규모는 1,337척에 달한다.

미국 재무부 제재 부서가 그림자 함대의 배로 지목한 유조선 "NS 챔피언". 사진 kees torn, CC BY-SA 2.0

이 배들은 단속을 피하려고 선명과 선적을 수시로 바꾼다. 실제로 유조선 "티아"는 "아르쿠사트"로 이름을 바꾸며 국제해사기구(IMO) 선박 식별번호까지 바꿔 달았다. 선명과 국기는 바꿔도 식별번호는 바꾸지 못하도록 마련한 안전장치마저 무력화한 것이다. 이런 신분 세탁 탓에 지난해 4월 에스토니아 해군은 지부티에 등록했다고 주장하는 무국적 유조선 "키왈라"를 나포했다가 보름여 만에 풀어줬다. 하지만 그해 9월 프랑스가 베냉 국기를 단 "보라케이"를 나포하고 보니 키왈라와 같은 배로 확인됐다.

국제 해양법이 통행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고 있어 붙잡더라도 오래 억류하기는 어렵다. 유엔 해양법 협약은 연안 12해리 영해 안에서도 무해통항권을 인정한다. 덴마크 해협 역시 1857년 코펜하겐 조약에 따라 자유 통항이 보장돼 있다. 지난해 3월 독일 세관은 엔진 고장으로 표류해 들어온 파나마 선적 유조선에서 원유 10만 톤을 압류했다. 하지만 그해 12월 뮌헨 법원은 조난 상태로 들어온 배는 압류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결국 압류 조치는 중단됐고 해당 원유 소유권의 향방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러시아 크렘린궁은 이런 나포를 "해적 행위"라 부르며 "러시아연방은 자국의 이익을 지킬 조치를 취할 자격이 있고 반드시 취할 것"이라고 맞섰다. 이는 단순한 엄포에 그치지 않았다. 지난해 6월부터 러시아 해군 코르벳함이 제재 대상 유조선을 호송하기 시작했고 올해 4월에는 프리깃함 한 척이 영국해협까지 따라붙어 호위에 나섰다. 영국 정부 역시 3월부터 5월 사이 제재 대상 184척이 자국 수역을 통과했다고 뒤늦게 시인했다. 그린치를 멈춰 세우는 데 프리깃함 한 척과 헬기 두 대, 영국 초계정 한 척이 동원됐지만 이 배는 3주치 정박 비용과 벌금을 치른 뒤 다시 지중해로 출항했다.

이 글이 어땠나요?

눌러 주시면 다음 글을 쓸 때 소중한 참고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