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그림 이야기

의자 하나 더 못 놓는 방을 지었다, 아르누보는 그래서 통째로 사라졌다

문손잡이부터 옷까지 건축가가 설계한 양식...따로 떼어 남길 수 없어 25년 만에 자취 감춰

리지

아르누보2분

1895년 벨기에 건축가 앙리 반 데 벨데는 브뤼셀 교외에 자택을 지었다. 집을 다 짓고 나서는 내부를 채울 집기까지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벽지와 직물, 은식기와 장신구를 손수 설계했고 살 사람이 입을 옷까지 지었다. 그렇게 지은 집에는 밖에서 사들인 물건을 놓을 자리가 없었다.

아르누보는 바로 이런 집을 짓고자 했다. 1890년부터 20년 남짓 유럽을 휩쓴 이 장식 양식은 회화와 조각을 위에 두고, 가구와 유리·장신구를 아래에 두던 19세기의 위계를 깨뜨리겠다고 나섰다. 빅토르 오르타는 브뤼셀에 아르누보의 첫 주택을 세웠다. 오르타는 왕실 건축가 밑에서 온실의 철과 유리를 다뤄 본 경험이 있었다. 1893년 좁고 깊은 대지에 대학교수의 주택인 타셀 저택을 지으며 그 경험을 파격적으로 살렸다. 집 한가운데 층계를 벽으로 가리지 않고 열어 둔 채, 그 위로 높은 천창을 올렸다. 각 층을 받치는 가느다란 철기둥을 나무줄기처럼 보이게 연출했다. 타셀 저택의 문손잡이와 양탄자도 오르타가 직접 설계했다.

오르타가 설계한 브뤼셀 타셀 저택의 층계. 층을 받치는 철기둥을 나무줄기처럼 세웠다. 위키피디아

유행이 지나 사그라들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실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완결된 아르누보 공간에는 의자 하나조차 더 들여놓기 어려웠다. 다른 양식의 물건이 하나만 섞여도 방 전체의 조형미가 깨졌다. 건축 양식이 퇴조하자 가구 역시 설 자리를 잃었다. 비싼 가격도 큰 걸림돌이었다. 기계는 1차 가공만 맡고 마무리는 사람 손을 거쳐야 했으니 숙련된 장인 없이는 물건을 만들기 어려웠다. 결국 1905년 무렵 프랑스에서 이 양식은 이미 모습을 감췄다.

파리 지하철 포르트 도핀역 출입구. 엑토르 기마르, 1900년, 파리 16구 현지 보존. 위키미디어 공용, Mbzt, CC BY-SA 3.0

대량생산이 가능했던 아르누보 품목은 손꼽힐 만큼 드물었다. 향수병이 대표적이었다. 목이 잘록하고 덩굴무늬가 감긴 이 유리병은 지금도 백화점 1층 진열대에 그 모습 그대로 놓여 있다. 어느 방에도 얽매이지 않는 독립된 물건이었던 까닭이다. 파리 지하철 출입구를 설계한 엑토르 기마르의 주철 난간 역시 거리에 놓인 덕분에 살아남았고, 1970년 뉴욕 현대미술관이 기마르 회고전을 열면서 이 양식은 다시 평가받기 시작했다. 반 데 벨데의 주택은 옷까지 맞춰 입어야 완성되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완성된 것들은 하나로 묶여 통째로 자취를 감췄고, 어디에 놓아도 상관없는 유리병만이 100년을 건너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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