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세상의 흐름

지폐와 통장 예금, 서로 다른 빚은 어떻게 ‘같은 돈’이 됐나

은행의 1대1 액면 상환 약속과 중앙은행의 준비금 결제가 지폐와 통장 숫자를 같은 값으로 잇는다

박정우 작가

화폐5분

Illustration by Gemini

지갑에서 꺼낸 1만 원 지폐와 스마트폰 화면에 찍힌 은행 예금 1만 원은 일상에서 같은 가치로 통용된다. 지폐를 은행에 맡기면 같은 금액이 통장에 기록되고, 예금을 현금으로 찾으면 다시 지폐를 돌려받는다. 지폐는 중앙은행의 부채이고 예금은 상업은행이 고객에게 진 빚인데, 어떻게 서로 다른 기관의 채무가 같은 돈으로 쓰일 수 있을까.

은행이 고객에게 약속한 지급 의무를 살펴보면 그 구조를 알 수 있다. 고객이 예금을 인출하면 은행은 현금을 지급한다. 다른 은행의 계좌로 송금하면, 받는 사람에게는 그 은행의 예금이 들어온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은행 사이의 지급 의무는 중앙은행에 둔 지급준비금으로 결제한다. 고객은 은행 예금으로 대금을 치르고, 은행은 준비금으로 다른 은행과 결제하는 구조다.

13일 67세로 세상을 떠난 페리 멀링 보스턴대 교수가 연구한 머니 뷰(Money View)는 이처럼 맞물린 지급 약속에서 금융을 본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지급해야 하며,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하는지가 금융기관과 시장을 연결하는 질문이다.

예금의 액면가와 증권의 시장가격

멀링은 이 관계를 화폐의 위계로 설명했다. 예금은 고객에게 지급 수단이면서 은행에는 상환해야 할 부채다. 은행들이 서로 결제할 때 사용하는 준비금은 중앙은행의 부채다. 같은 자산도 그것을 보유한 사람과 발행한 기관의 위치에 따라 역할이 달라진다.

은행 예금과 현금을 연결하는 가격은 액면가(par)다. 요구불예금 1만 원을 현금 1만 원으로 돌려준다는 약속이 유지되면 고객은 예금을 지폐와 같은 값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은행은 인출과 이체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며 이 약속을 이행한다. 중앙은행은 은행에 준비금을 공급해 은행 간 결제가 이어지도록 뒷받침한다.

은행이 지급 자금을 조달하는 과정에는 시장 거래도 포함된다. 은행은 준비금과 현금 외에도 국채 같은 유동성 자산을 보유하고, 필요할 때 이를 매각하거나 담보로 제공해 자금을 차입하면서 지급 수요에 응한다. 보유한 증권으로 자금을 조달하려면 그 증권을 매입하거나 담보 대출을 내줄 거래 상대방이 시장에 존재해야 한다.

증권을 현금화할 때는 예금의 액면가와 다른 가격 관계가 작동한다. 채권을 만기 전에 팔아 예금을 확보하려면 시장에서 매수자를 찾아야 하고, 매각 대금은 금리와 신용 위험 등에 따라 달라진다. 멀링의 2012년 논문도 예금과 현금 사이의 액면가 관계와 증권의 가격을 좌우하는 이자율을 구분한다.

멀링은 자본시장과 단기자금시장의 통합에도 주목했다. 증권 거래를 맡는 딜러 역시 보유 증권의 자금을 단기자금시장에서 마련하기 때문이다. 증권 딜러는 매수·매도 호가를 제시하고 증권을 보유하면서 거래 상대방이 사고팔 수 있게 한다. 그 증권을 담보로 단기 자금을 빌리는 수단이 환매조건부채권(레포) 거래다. 딜러가 증권을 계속 보유하려면 만기가 돌아온 조달금을 갚거나 새 거래로 차환해야 한다. 증권을 팔 수 있는 시장과 그 증권을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는 시장이 여기서 연결된다.

호황기에는 자금 공급자가 차환에 응하고 딜러도 증권 보유를 늘리면서 신용이 팽창할 수 있다. 거래 상대방이 자금 공급을 줄이면 같은 증권을 보유하고 있어도 만기가 돌아온 빚을 갚기 어려워진다. 지급이나 차환에 필요한 돈을 제때 확보하지 못하는 것이 유동성 문제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일부 양자간 레포에서는 자산유동화증권 등 질이 낮은 담보에 적용하는 헤어컷이 높아졌다. 헤어컷은 담보 가치에서 자금 제공자가 차감하는 비율이다. 이 비율이 높아지면 같은 가치의 담보로 빌릴 수 있는 돈이 줄어든다. 일부 자산은 담보로 아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뉴욕 연준 연구진이 확인한 이 움직임은 삼자간 레포에서 헤어컷이 대체로 안정적이었던 것과 차이가 있었다.

조달금이 줄어든 투자자는 부족한 돈을 마련하려고 증권을 매각해야 한다. 매각이 가격을 더 낮추면 담보 가치도 떨어져 조달 여력이 다시 줄어든다. 증권 가격의 하락과 단기 자금 조달의 위축이 서로를 강화하는 과정이다. 보유 자산의 가치가 부채를 감당하는지와 오늘 만기가 돌아온 돈을 지급할 수 있는지가 함께 압박받는다. 은행도 지급에 대비해 보유한 증권을 매각하거나 담보로 자금을 마련하기 어려워지면, 인출과 이체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데 제약을 받는다.

증권을 보유할 자금이 끊겼을 때

중앙은행의 대응도 자금을 필요로 하는 주체와 시장의 관계를 따라 달라진다. 월터 배젓은 1873년 롬바드 스트리트에서 공황 때 양질의 담보를 받고 높은 금리로 충분히 대출하라는 원칙을 제시했다. 그가 다룬 단기 자금 조달의 위험에는 은행뿐 아니라 어음중개업자의 문제도 포함돼 있었다. 자산을 보유한 기관이 당장 지급할 돈을 구하지 못할 때 중앙은행의 대출이 대응 수단이 된다.

멀링은 2011년 새로운 롬바드 스트리트에서 금융위기 당시 연방준비제도(Fed)의 개입을 최종 딜러(Dealer of Last Resort)라는 관점으로 설명했다. 민간 거래 상대방들이 서로 돈을 빌려주려 하지 않을 때 연준이 자금 중개를 맡고 증권시장에도 개입했다는 해석이다.

그의 후속 논문은 최종 딜러의 거래 조건을 넓은 매수·매도 호가 차이로 설명한다. 민간 시장이 위축됐을 때 거래할 상대방을 제공하되, 시장이 회복되면 민간 참가자끼리 더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개입의 대상에는 증권을 현금화할 통로와 그 증권을 보유할 자금을 조달하는 통로가 함께 들어간다.

연준이 2021년 7월 28일 설치한 상설 레포 기구(SRF)는 국채와 정부기관채, 정부기관 보증 주택저당증권을 담보로 익일물 자금을 공급해 단기자금시장의 안전판을 제공하는 장치다. 프라이머리 딜러와 대상 예금취급기관에 담보 조달의 통로를 마련한다. 은행은 대상 증권을 보유하고 이 기구의 거래 조건을 충족하면, 증권을 시장에서 매각하는 대신 담보로 제공해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

1달러 상환 약속과 준비자산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에서도 발행사의 지급 약속과 그 이행에 필요한 자금의 관계가 드러난다. 서클이 발행하는 USDC는 발행사가 1코인을 1달러로 상환하는 구조다. 유통시장에서 USDC를 매수하는 사람에게도 그 상환 가능성은 가격을 지탱하는 근거가 된다.

2023년 3월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하자 서클은 USDC 준비자산 중 은행 예금 33억 달러에 접근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상환 요구가 늘었고 주말에는 발행사의 상환 처리도 중단됐다. USDC를 즉시 달러로 바꾸려는 보유자들의 매도가 유통시장으로 몰렸고, 미국 재무부 금융조사국(OFR)은 당시 가격이 0.87달러까지 하락했다고 기록했다.

서클의 자산을 보관하던 은행의 문제가 USDC의 상환 우려로 이어진 것이다. 미국 당국이 SVB의 모든 예금자를 보호한다고 발표한 뒤 USDC 가격은 회복됐고, 서클이 3월 13일 상환 처리를 재개하면서 달러와의 등가를 회복했다. 토큰의 상환 약속을 이행하려면 발행사가 준비자산에 접근해 실제로 달러를 지급할 수 있어야 했다.

이런 발행사의 준비자산에는 은행 예금과 함께 단기 국채도 쓰인다. 테더가 공개한 BDO의 확인을 받은 준비자산 보고서에서 2026년 6월 말 직접 보유한 미국 단기 국채는 약 1150억 달러였다. 국채는 만기 상환이나 매각으로 달러를 확보할 수 있는 준비자산이며, 토큰의 달러 상환을 뒷받침한다.

지갑 속 지폐와 통장 속 숫자가 같은 값으로 쓰이는 것은 은행이 현금 인출과 이체를 액면대로 이행하기 때문이다. 증권의 매각과 담보 차입은 은행이 그 지급 자금을 마련하는 경로이고, 중앙은행의 준비금 공급은 은행 간 결제를 뒷받침한다. 1만 원 예금을 가진 고객이 돈을 쓸 때마다 지폐를 찾지 않아도 되는 배경에 이 연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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