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야기
평평한 캔버스 위에 가짜 깊이를 꾸미지 마라...원시 입체주의가 세운 다면체의 진실
르네상스 500년 원근법 거부하고 캔버스에 사물의 전후좌우 동시에 펼쳐내...20세기 추상미술 연 4년의 사투

1907년 프랑스 파리의 가난한 언덕 몽마르트르에 자리한 작업실에서 젊은 미술가들이 기묘한 모순에 부딪혔다. 오랜 세월 서양 회화를 지배해 온 르네상스 원근법이 이들을 가로막았다. 평평한 캔버스 위에 가짜 깊이를 꾸며내는 정교한 착시였기 때문이다. "평평한 캔버스 위에 둥근 구체를 흉내 내거나 꽃병의 주둥이를 수평선으로 속이는 짓은 지나간 시대의 기만이다." 프랑스 화가 장 메체인제가 훗날 회고록에 남긴 말이다. 이 기만을 걷어내고 평면이라는 캔버스의 조건에 충실한 새로운 조형을 세우는 일이 당시 청년들에게 절실했다.
원시 입체주의는 1906년 무렵부터 1910년까지 프랑스에서 나타난 짧은 과도기 화풍이다.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를 비롯한 젊은 화가들은 르네상스 원근법의 착시를 걷어내고 평면이라는 캔버스의 조건에 맞는 조형을 찾으려 밀고 나갔고, 뒤이어 입체주의로 이어졌다.
화가들은 사물의 겉모습을 벗겨내고 골격을 찾기 시작했다. 그 탐색의 길목에서 세상을 떠난 화가 폴 세잔이 남긴 편지 한 줄이 길잡이가 됐다. "자연을 원기둥과 구, 원뿔로 다루라." 이 가르침을 이어받은 조르주 브라크는 남프랑스 에스타크의 고가교를 그리며 소실점을 지우고 집과 다리를 각진 덩어리로 쌓아 올렸다. 파리의 아틀리에에서도 시인들이 자유시를 짓듯 붓질을 음절처럼 쪼개어 화면에 기하학적 면으로 이어 붙였다.

수학자 모리스 프랭세가 건넨 다차원 기하학 이론도 화가들의 손끝을 자극했다. 그 이론 앞에서 사물을 단 하나의 고정된 시점에서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법칙은 흔들리고 있었다. 화가는 대상 주위를 천천히 돌며 기억과 시간을 겹쳐 쌓았다. 그렇게 사물을 파악하는 능동적인 행위가 화폭 위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전통 화단의 반응은 차가운 조롱이었다. 파리에서 열린 살롱전에 등장한 이 각진 입체파 그림들을 두고 비평가 루이 보셀은 "괴상한 입방체들"이라고 혹평했다. 미국 시인 겔렛 버지스 역시 이들을 "파리의 야만인들"이라 부르며 "화성인의 가죽을 벗겨놓은 듯하고 뼈마디가 뒤틀린 끔찍한 그림"이라고 혹평했다. 급기야 파리의 앙데팡당전에 화가 알베르 글레이즈와 페르낭 레제 등의 작품이 함께 걸렸을 때 파리 언론은 "입체주의"라는 이름을 조롱 섞인 낙인으로 찍어 눌렀다.

그렇다면 원시 입체주의 화가들이 빚어낸 거친 각과 면들은 그저 기괴함을 좇은 일탈이었을까.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그 저항 속에서 화가들은 500년 동안 자신의 발을 한자리에 묶어 둔 단일 시점의 틀을 깨뜨렸다. 피카소와 메체인제는 대상의 앞모습과 옆모습, 위에서 내려다본 면을 단 하나의 화면에 동시에 배치했다. 그 기하학적 파편들은 사물의 온전한 전체성을 캔버스 위에 담아내려는 치열한 사투였다.
물론 화단이 정해둔 고전적 미의 기준에서 보면 이들의 그림은 해부학과 비례를 배반한 괴물에 가까웠다. 전통 회화가 감상자에게 달콤한 착시를 선물했다면, 원시 입체파의 화폭은 감상자에게 낯선 긴장과 능동적인 해석을 요구했다. 메체인제가 말했듯 "누구도 마실 수 없는 유리잔과 누구도 헤엄칠 수 없는 해변"을 그리면서 회화는 자연의 복제품이라는 오랜 굴레를 벗어던졌다. 이 짧고 격렬했던 과도기가 없었더라면, 현대 추상미술의 문은 결코 열리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원시 입체주의가 해체해 놓은 조형 언어 속에서 살아간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입체 공간을 설계할 때 화면을 채우는 다각형 와이어프레임과, 복잡한 현실을 기하학적 면으로 압축하는 현대 디자인의 원리는 모두 그 시절 아틀리에에서 싹텄다. 르네상스가 빚어낸 매끄러운 원근법의 환상은 빛바랜 박물관의 액자 속에 머물러 있지만, 평평한 면 위에서 사물의 본질을 찾고자 깎아 세운 다면체의 선들은 오늘날 디지털 화면 위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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