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그림 이야기

입체주의 조각, 덩어리를 버리고 허공을 빚다

3차원 회화 흉내 내던 덩어리 벗어나...빈 공간과 조립으로 새로운 조각의 길 열어

리지

입체주의 조각3분

Illustration by Gemini

1909년 가을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의 바토라부아르 작업실에서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점토 흉상 한 점을 빚었다.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의 얼굴을 본뜬 <여인의 두상>이었다. 미술사학계는 <여인의 두상>을 입체주의 최초 조각으로 꼽는다. 하지만 피카소의 시도는 기대와 달랐다. 화폭에서 번지던 긴장감이 자취를 감췄다. 평면에 여러 단면과 시간을 겹쳐 놓던 날 선 감각은 흙덩어리 위에서 각지게 다듬은 굴곡에 그쳤다. 미술사학자 퍼넬러피 커티스가 지적한 그대로였다. 입체주의가 조각보다 회화에서 훨씬 흥미롭다는 사실만 드러났다. 피카소는 이미 입체인 조각에서 무엇을 더 입체화해야 하는지 답을 찾지 못했다. 조각은 출발부터 회화의 꽁무니를 쫓는 조연이라는 회의에 부딪혔다.

조각을 속이 찬 덩어리로만 보던 통념이 문제였다. 고대 그리스 이래 조각은 돌을 깎고 흙을 붙여 부피를 완성하는 작업이었다. 화가들이 원근법을 깨고 사물을 평면으로 해체할 때 조각가들은 각진 면을 덩어리 표면에 칼로 새겼다. 회화의 번역에 그친 까닭이다. 물속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못하듯 통념은 오랫동안 조각을 가두는 틀이었다. 19세기 천연얼음 업계는 인공얼음이 나오자 톱만 더 날카롭게 갈았다. 알려진 덩어리 안에서 칼질을 정교하게 해봐야 새로운 조각은 나오지 않는다. 대체 불가능한 혁신은 기존 덩어리를 깎는 손끝을 넘어 판 자체가 새로 짜일 때 나타났다.

조각 한가운데에 구멍을 뚫는 결단이 조각의 판을 바꿨다. 키이우에서 파리로 온 알렉산드르 아키펜코는 고대 조각을 깊이 연구했다. 아키펜코는 <걸어가는 여인>에서 몸통 한가운데를 비워 허공을 통과시켰다. 수천 년 동안 없애야 할 결손으로 취급받던 음각의 빈 공간이 조각의 주연으로 올라섰다. 빈 구멍이 몸체의 윤곽과 입체감을 결정했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저서 『창조적 진화』에서 짚은 이치였다. 비어 있는 틈새는 인간의 의식이 능동적으로 채워 넣는 또 다른 실체였다. 뚫려 있는 허공 그 자체가 단단한 조각의 살이 되었다.

오토 구트프로인트의 입체주의 흉상. 위키피디아

덩어리가 깨지자 조각을 만드는 법도 달라졌다. 조르주 브라크는 종이를 접어 공간을 탐색했다. 피카소는 골판지와 양철판을 가위로 오려 <기타>를 만들었다. 돌을 깎거나 점토를 붙이는 대신 얇은 평면들을 허공에서 맞물려 세우는 조립 기법이 탄생했다. 오토 구트프로인트는 흉상의 얼굴을 다각의 평면으로 날카롭게 해체했다. 레이몽 뒤샹-비용은 <말>에서 동물의 근육을 기계의 피스톤과 결합했다. 기계 문명과 유기체가 맞물려 새로운 입체감을 드러낸 절정이었다. 조각은 공간과 구조를 조립하는 건축물로 거듭났다.

레이몽 뒤샹-비용의 청동 조각 말. 위키피디아

당대 관객에게 이 시도는 난폭한 파괴로 비쳤다. 파리 살롱 데 쟁데팡당에서 조제프 차키가 각진 조각을 공개했을 때 전시장엔 야유가 터져 나왔다. "사회에 폭탄을 던진 기분이었다"는 차키의 회고처럼 비난이 이어졌다. 하지만 입체주의 조각가들은 3차원 공간을 바라보던 인간의 시각 규칙을 부수며 새로운 공간을 구축했다. 조각가는 겉모습을 베끼는 기술자에서 공간의 구조를 설계하는 건축가로 바뀌었다.

입체주의 조각가들이 뚫어놓은 허공은 오늘날 일상 풍경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도심 광장의 대형 철판 조각에 뚫린 창으로 빌딩 숲과 햇빛이 오간다. 자동차 차체의 볼록면과 오목면이 날카롭게 교차하며 공기의 저항을 가른다. 오랜 세월 우리는 이 조각가들이 발명한 시각 문법 속에서 산다. 1909년 피카소가 진흙 흉상 앞에서 마주했던 덩어리의 한계는 허공을 재료로 쓴 현대 산업 디자인의 원리로 이어졌다. 미국 뉴욕 근대미술관은 피카소가 골판지와 철사로 조립한 <기타>를 영구 소장품으로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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