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그림 이야기

포스트모더니즘 미술, 잡화점 햄버거로 허문 순수의 벽

엄숙한 모더니즘 형식주의 벗어나...대중문화와 결합해 현대 시각 예술로 남아

리지

포스트모더니즘 미술3분

Illustration by Gemini

1961년 겨울 미국 뉴욕 이스트빌리지 허름한 건물에 조각가 클라스 올든버그가 가게를 열었다. 쇼윈도 안에는 고상한 회화 대신 석고로 거칠게 빚은 햄버거와 샌드위치, 음료수병이 널려 있었다. 올든버그는 이곳에 "가게(The Store)"라는 간판을 내걸고 손님들에게 가짜 먹거리를 몇 달러에 팔았다. 그는 미술관이라는 닫힌 성역에서 벗어나 매일 소비되는 상품의 거리로 예술을 끌어내렸다. 올든버그는 "미술관이라는 부르주아적 개념은 내게 상점과 같다"고 선언했다. 이 파격적인 선언으로 순수와 영원을 독점하던 근대 예술의 높은 벽에 균열이 생겼다.

당시 서양 예술계는 모더니즘의 엄격한 순수성이 지배했다. 건축가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의 구호처럼 모더니즘 진영은 불필요한 장식을 털어내고 순수한 형태만 남겨야 한다고 여겼다. 도시 곳곳에는 장식을 완전히 지워버린 차가운 유리와 콘크리트 상자 같은 건물이 들어섰다. 상업 문화나 대중 취향에 물드는 일은 예술의 치명적인 변질로 취급됐다. 하지만 완벽주의에 가까웠던 이 순수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메마른 지루함을 낳았다. 대중의 일상과 단절된 채 거대한 사원처럼 경직된 모더니즘 규범 앞에서 피로감이 번졌다.

마이클 그레이브스가 고전적 장식과 화려한 색채를 조합해 지은 포틀랜드 빌딩. 사진 Steve Morgan, 위키피디아 CC BY-SA 3.0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엄숙주의에 던진 유쾌한 도전이었다. 이에 맞서 건축가 로버트 벤투리는 "적을수록 지루하다(Less is a bore)"고 맞받아치며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네온사인과 대중적인 상업 간판을 다시 살폈다. 이어 이론가 찰스 젱크스는 1972년 여름 세인트루이스의 모더니즘 공공아파트가 폭파되자 모더니즘의 공식 사망을 선언했다. 젱크스는 첨단 건축 기술에 대중적인 옛 장식을 능청스럽게 결합하는 "이중 기호화(double coding)"를 해법으로 제시했다. 단일한 정답을 강요하던 독점에서 벗어나 여러 목소리가 공존하는 시각 언어가 태어났다.

그렇다면 대중적인 상업 이미지와 키치를 받아들이는 일은 예술의 타협에 불과한 것일까. 대중문화의 복제와 과거 양식의 짜깁기가 예술의 진지함을 훼손했다는 비판은 거셌다.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이성의 성취를 허무는 자기모순에 빠졌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은 단 하나의 거대서사가 지배하는 세계를 믿지 않았다. 철학자 장프랑수아 리오타르가 지적했듯 "거대서사에 대한 불신"이야말로 다양성을 억압하던 낡은 권위의 족쇄를 푸는 돌파구였다.

클라스 올든버그가 일상적 공구의 크기를 극단적으로 키워 잔디밭에 꽂아둔 대형 조각 <흙손>. 사진 Ronald Saunders, 위키피디아 CC BY 2.0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은 경계를 허무는 혼성모방(pastiche)을 앞세웠다. 앤디 워홀은 슈퍼마켓 통조림 캔을 판화로 찍어내며 순수 회화와 광고의 울타리를 허물었다. 마이클 그레이브스는 1982년 완공한 포틀랜드 빌딩 벽면에 고전 신전의 기둥을 장난감처럼 배치했다. 올든버그는 공사장의 흔한 흙손을 거대한 조형물로 키워 잔디밭 한복판에 세웠다. 숭고한 영웅 대신 일상의 도구가 미술관 좌대에 올랐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이 촉발한 시각 혁명은 더 이상 낯선 도발이 아니다. 명품 패션 브랜드가 거리의 그래피티와 협업하고 대형 쇼핑몰이 미술관처럼 공간을 연출하는 풍경은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고급과 저급, 예술과 상업을 가르던 경계선은 현대 소비문화 속으로 완만하게 스며들었다. 1961년 겨울 이스트빌리지 잡화점에서 올든버그가 손님들에게 팔았던 작은 석고 햄버거들은 미국 뉴욕 근대미술관의 주요 전시실에 영구 소장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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