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그림 이야기

베르사유 벗어나 파리 살롱으로...군주 위엄 대신 친밀함 택한 로코코

루이 14세 별세 뒤 거대한 궁정 벗어나...사적 대화와 안락함으로 생활 공간 바꿔

리지

로코코3분

Illustration by Gemini

1717년 파리 왕립 아카데미 심사 자리에 그림 한 점이 올라왔다. 화가 앙투안 와토가 회원 자격을 얻으려고 낸 <키테라 섬으로의 순례>였다. 당시 아카데미가 세운 회화 서열은 엄격했다. 성서와 신화, 군주의 승전을 담은 역사화가 회화 서열의 맨 위에 섰다. 하지만 와토의 화폭에는 영웅도 성인도 없었다. 햇살 내리는 숲속에서 고운 옷을 입은 귀족들이 사랑을 속삭였다. 야외 소풍 장면이 담겼을 뿐이었다. 엄숙한 규범에 익숙했던 심사위원들은 혼란에 빠졌다. 기존 어떤 서열에도 끼워 넣을 수 없었다. 결국 아카데미는 전에 없던 새 분과를 마련했다. 와토 한 사람을 회원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였다. 새 분과에 "우아한 연회(fête galante)"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파격은 와토 혼자만의 취향이 아니었다. 1715년 프랑스를 지배하던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난 데서 변화가 시작됐다. 베르사유 궁전의 엄격한 규율에 묶여 있던 귀족들은 서둘러 파리로 돌아왔다. 귀족들은 파리 시내에 저택을 세웠다. 거대한 전당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귀족들에게는 아담한 방이 필요했다. 벗과 마주 앉아 편안히 이야기를 나눌 공간이었다. 웅장하고 무거운 바로크의 위세가 물러났다. 그 자리에 사적인 대화와 안락함을 누릴 살롱이 들어섰다.

앙투안 와토가 그린 <키테라 섬으로의 순례>(1717년). 위키피디아

살롱 안으로 들어간 예술은 공간의 규모와 빛깔을 바꿨다. 방의 높이와 너비가 줄어들자 벽면 장식과 가구도 한결 날렵해졌다. 차가운 대리석은 물러났다. 백색 벽면 위에 분홍과 하늘색, 아이보리빛 파스텔톤이 물들었다. 문과 벽면 모서리에는 유려한 곡선 장식이 물결처럼 이어졌다. 조개 문양에서 따온 "로카유(rocaille)"였다. 곧은 직선과 좌우 대칭의 규칙은 비대칭의 율동 속으로 녹아들었다. 군주의 왕좌처럼 딱딱했던 의자는 자취를 감췄다. 등을 기댈 수 있는 푹신한 안락의자로 바뀌었다. 조형의 목적이 달라졌다. 군주의 위엄 대신 몸의 안락과 촉각적 쾌락을 좇았다.

파리 수비즈 저택의 살롱 드 라 프랭세스. 위키피디아 CC BY-SA 3.0

하지만 감각적 쾌락을 좇던 예술은 오래가지 못했다. 거센 반격이 시작됐다. 폼페이 유적이 발굴됐다. 지식인들은 다시 로마의 단정한 기하학으로 돌아섰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비판이 잇따랐다. 방 안 가득 뒤엉킨 장식을 두고 공적 책임을 잊은 타락이라고 꾸짖었다. 건축가 자크프랑수아 블롱델도 실내 장식을 꼬집었다. "조개껍데기와 식물이 우스꽝스럽게 뒤섞인 난맥상"이라고 했다. 신고전주의 화가 피에르모리스 케는 이 장식을 비꼬았다. "로코코"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붙였다. 프랑스 혁명의 거센 물결이 일었다. 로코코에는 귀족의 퇴행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결국 단두대 아래서 끝을 맺었다.

하지만 그 시선은 살아남았다. 군주의 위엄을 내려놓고 일상의 친밀함을 바라본 시선이었다. 거대한 국가 서사에서 벗어났다. 아늑한 대화에 귀를 기울였던 감각은 오늘날 시각 문화 구석구석에 흐른다. 마카롱 상자를 감싼 분홍빛 리본과 파스텔톤 포장지가 그렇다. 디저트 카페의 아담한 몰딩에도 로코코의 흔적이 남아 있다. 루브르 박물관은 1793년 문을 열었다. 개관 이래 앙투안 와토의 <키테라 섬으로의 순례>를 중심 벽면에 걸었다. 오늘날에도 매일 관람객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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