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그림 이야기

넵스키 대로 이름까지 바꿨다...국가 예산으로 국가와 싸운 프롤레트쿨트

상반기에만 920만 금루블 지원받아...자율 요구하다 교육인민위원부 산하로

리지

프롤레트쿨트2분

러시아 북서부 도시 페트로그라드의 시 당국은 1918년 도심 큰길 하나의 이름을 "프롤레트쿨트 거리"로 바꿨다. 넵스키 대로라 불리던 이 도시 제일의 번화가였다. 지금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불리는 도시다. 이름을 얻은 프롤레트쿨트는 그 길가 건물을 넘겨받았다. 문을 연 지 몇 달밖에 안 된 예술 단체였다.

프롤레트쿨트는 "프롤레타리아 문화·계몽 조직"의 줄임말이다. 러시아 혁명 직전인 1917년 10월 노동자 문화·교육 활동가들이 세웠다. 노동계급이 스스로 예술과 문화를 만들도록 가르치자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러시아 곳곳에 화실과 극장, 잡지를 두고 1932년까지 활동했다.

프롤레트쿨트는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 문화·교육 조직 회의에서 출범했다. 창립을 이끈 인물은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였다. 몇 주 뒤 소비에트 정부의 교육인민위원, 곧 교육·문화를 맡는 장관이 되는 사람이다. 이들이 내건 목표는 노동계급이 스스로 만드는 새 예술이었다. 지도부의 한 사람인 플라톤 케르젠체프는 이 단체가 "계급에 한정된 노동자 조직이며 활동에서 완전히 자율적"이어야 한다고 적었다.

자율을 내건 이 단체의 운영비는 국가가 댔다. 교육인민위원부가 1918년 상반기에 내준 돈이 920만 금루블이었다. 이 부처 성인교육국 전체 예산의 3분의 1에 가까웠다. 넵스키 대로의 건물도 정부가 징발해 넘긴 것이었다.

교육인민위원부가 댄 돈은 화실로 갔다. 프롤레트쿨트의 이론을 세운 창립자는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다. 그는 예술을 배워서 익히는 기술로 규정했다. 기초 기법을 몇 차례 배우면 누구나 프롤레타리아 예술가가 된다고 봤다. 3년 만에 지부는 300곳, 등록 회원은 8만 4,000명으로 늘었다.

프롤레트쿨트 모스크바 지부가 낸 잡지 "트보리"(창조하라) 표지. 화가 알렉산드르 주그린이 그렸다. 출처는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

화실이 내놓은 그림은 당대의 미래주의와 구성주의를 닮았다. 프롤레트쿨트는 고전적 형식을 말로만 인정했고 사진과 영화, 콜라주 같은 새 기법을 강하게 권했다.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는 선전 포스터에 스텐실과 선동시, 투박한 노동자 그림을 함께 썼다. 민속 판화에 가까운 화면이었다.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가 내전기에 만든 선전 포스터. 출처는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

레닌은 1919년 5월 프롤레타리아 문화라는 관념을 "환상"이라 불렀다. 그런 관념에 "가차 없는 적의"로 반대한다고 말했다. 이듬해 10월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모스크바 전국대회에서 프롤레트쿨트의 교육인민위원부 편입을 통보했다. 활동가들이 그 뒤에도 자율을 놓지 않자 12월 1일 프라우다에 규탄 결의문을 실었다. 예산을 대던 부처의 한 부서가 된 프롤레트쿨트는 12년 뒤 문을 닫았다.

프롤레트쿨트 극장에서 연출을 시작한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은 "파업"과 "전함 포템킨"을 찍었다. 러시아 혁명기 문화를 연구한 역사가 피터 케네즈는 그의 초기 영화가 모두 프롤레트쿨트의 이념을 표현했다고 적었다. 개인의 공적 대신 노동자와 농민의 집단을 앞세운 화면이었다. 굵은 사선과 얼굴이 뭉개진 군중은 오늘의 영화 포스터와 시위 벽보에도 남아 있다. 그 거리는 지금 다시 넵스키 대로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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