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야기
단색화, 도쿄 화랑 주인이 붙인 이름...선언문도 단체도 없던 다섯 사람
1975년 도쿄화랑이 흰색을 보고 지은 전시 제목...한국 미술계가 그 말을 표제어로 쓰기까지 25년
1975년 도쿄의 한 화랑이 한국 그림 다섯 벌을 걸고 전시 제목을 "다섯 한국 작가, 다섯 가지 흰색"이라고 달았다. 제목을 지은 사람은 그 화랑의 관장 야마모토 다카시였다. 그가 그림에서 본 것은 흰색이었다. 걸린 작가 다섯은 그때까지 한 무리로 묶여 본 적이 없었고, 함께 낸 선언문도 함께 만든 단체도 없었다. 뒷날 이 사조의 역사를 정리한 큐레이터 윤진섭은 단색화를 처음 알아본 사람이 그 일본인 관장이었다고 썼다.
단색화는 1970년대 초 한국에서 나온 추상회화의 한 갈래다. 흰색처럼 색을 지운 한 가지 색조로 화면을 채우고, 무엇을 그리는 대신 종이를 찢거나 물감을 밀어내는 손동작을 되풀이해 재료와 과정 자체를 화면에 남긴 그림들을 이른다. 서울에서 따로 작업하던 화가들이 각자 그렇게 그렸고, 묶는 이름은 뒤에 붙었다.
묶인 적 없는 사람들의 화면이 서로 닮아 간 데에는 작업실 밖의 사정도 있었다. 미술사학자 조앤 키는 초기 작가들이 회화의 관행을 벗어난 재료를 쓰기 시작한 까닭의 하나로 전후 한국의 물자 부족과 1970년대에 오른 기름값을 들었다. 유화 물감이 귀해지자 손에 잡히는 것이 재료가 됐다. 초기 작가의 하나인 화가 권영우는 화선지를 손과 도구로 찢었다. 하종현은 캔버스 뒤에서 물감을 밀어 굵은 올 사이로 배어 나오게 했다.
이들은 매끈한 화면에 함께 등을 돌렸다. 박서보는 마르지 않은 물감 위로 같은 동작을 되풀이해 지나가며 선을 냈다. 손이 지나간 자리가 곧 그림의 내용이었다. 권영우, 하종현과 같은 1970년대에 이 갈래에서 작업한 화가 최명영은 자기 작업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로 같은 것이 되풀이되어 변화가 없는 상태를 뜻하는 "단조로움"을 꼽았다. 그 단조로움이 오히려 표현을 연다고 했다.

이름은 없어도 자리는 생겼다. 박서보는 1970년부터 한국미술협회 국제담당 부이사장과 이사장을 잇달아 맡으며 큰 전시를 꾸렸다. 박서보가 꾸린 전시들이 젊은 작가의 무대가 되면서 문화·예술 행정을 맡던 정부 부처 문화공보부가 주관하던 국전은 그 자리를 내줬다. 도쿄에서 한국 현대미술전을 연 일본 비평가 나카하라 유스케는 1977년 그 도록에, 색을 지운 그림이 한국에 퍼질 만큼 퍼져 이제 하나의 운동이 됐다고 썼다.

운동이 되자 국가가 그것을 썼다. 1978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현대미술전에 문화공보부가 이들을 보냈다. 형상이 없는 그림이 한국적인 것의 표시로 밖에 나갔다. 1980년대에 단색화는 한국 현대미술의 얼굴이 됐고 작가들은 검열을 피했다. 현실을 그리자는 민중미술이 맞은편에 섰고, 비평가 권영진은 단색화가 박정희 정권 앞에서 침묵했다고 짚었다.
"단색화"라는 말은 2000년 광주에서 국제 미술계의 표제어가 됐다. 윤진섭은 전시 도록에 번역어 "한국 모노크롬 회화" 대신 음역을 적었다. 2015년에는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와 별개로 비엔날레 회기 중에 열리는 전시, 곧 부대전시 하나가 팔라초 콘타리니 폴리냐크에서 제목을 그냥 "단색화"로 달고 열렸다. 정작 이강소와 최병소는 그 이름을 받지 않았다. 자기 작업도 단색화도 잘못 읽은 분류라고 했다.
2017년 한국예술경영지원센터가 1차 자료를 모아 낸 자료집에서 편집자들은 누구를 단색화에 넣을지부터 다퉜다고 밝혔다. 편집자 이필은 1970년대에 활동한 여성 작가의 자료를 끝내 찾지 못했다고 밝히고 뒷사람이 찾아 달라고 했다. 같은 책에 실린 윤난지의 글에 1970년대 전시에 이들과 함께 걸렸던 이름이 적혀 있다. 진옥선, 이향미, 신옥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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