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야기
렘브란트보다 비쌌던 에칭...판마다 다르게 찍어 지킨 희소성
판 하나를 28개 상태로 쪼개 팔던 호황...한정판 번호와 서명이 이때 시작
1902년 런던의 한 화상에서 에칭 한 장이 한두 기니에 팔렸다. 기니는 당시 영국에서 쓰던 화폐 단위다. 산 사람은 대영박물관에서 판화를 맡은 큐레이터 캠벨 도지슨이고, 그린 사람은 그해 런던에서 처음 전시를 연 무어헤드 본이다. 그로부터 16년 뒤 도지슨은 같은 화가의 판화 한 장에 63파운드까지 치렀다. 한두 기니면 2파운드 안팎으로, 값이 30배 넘게 오른 것이다.
1902년의 한두 기니와 1918년의 63파운드 사이에 에칭 부활이 있었다. 19세기 중반 화가들이 인쇄공의 복제 도구로 쓰이던 에칭을 제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되찾아 간 흐름으로, 판화를 남이 그린 그림의 사본에서 화가의 작품으로 팔리게 만들었다. 에칭은 구리판에 산으로 선을 파내고 그 홈에 잉크를 채워 종이에 찍는 판화 기법이다. 판 하나로 그림 한 장을 여러 벌 찍을 수 있고, 그렇게 찍어낸 종이 한 장을 인쇄본이라 부른다.
이 흐름은 프랑스와 영국, 미국에서 일어났다. 구리판에 산으로 선을 파 찍는 옛 기법은 그때까지 복제를 위한 도구였다. 이 흐름이 그 기법을 화가의 손에 돌려주었고, 판화는 남이 그린 그림을 옮기는 일에서 제 그림을 만드는 일이 됐다. 당대에 "슈퍼 에처"로 불린 작가들의 판화는 렘브란트와 뒤러의 좋은 인쇄본보다 비싸게 팔렸다.
판화의 값은 좋은 인쇄본이 몇 장밖에 없다는 데서 나온다. 그런데 그 수를 늘리는 기법이 19세기 중반에 특허를 받았다. 강철 피막이다. 구리판에 아주 얇은 철을 전기도금한다. 그러면 선이 훨씬 오래 버틴다. 드라이포인트로 판을 긁으면 홈 옆에 연약한 구리 가시가 솟는데, 그 가시까지 잘 버텼다.

그래서 화가와 인쇄공은 한 장 한 장을 다르게 만들었다. 판화의 기법을 가려내는 안내서를 쓴 미술사학자 뱀버 개스코인은 이 사조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으로 표면 톤에 대한 집착을 꼽았다. 판에 묻은 잉크를 일부러 다 닦아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화면 한쪽에 잉크 막의 옅은 톤이 남는다. 같은 판으로 찍어도 인쇄본마다 화면이 달라졌다.
판의 상태를 쪼개 파는 방식이 여기에 붙었다. 화가들은 판을 고쳐 가며 중간 단계를 "시험 인쇄"라 적어 내놓았고, 수집가는 이 그림을 여러 벌 샀다. 본은 판화 한 점에 28개 상태를 남겨 이 방면의 최다로 꼽힌다. 인쇄본에 번호와 서명을 넣어 한정판으로 파는 관행도 이 호황에서 자리를 잡았다.

1926년 에드워드 호퍼가 그해의 판화 연감을 평했다. 화가들이 "낡은 문간과 베네치아 궁전, 고딕 성당" 주위에 보기 좋은 선을 짜고 있다고 썼다. 3년 뒤 월가가 무너지고 "모든 것이 팔리지 않게" 됐다. 도지슨은 1940년대까지 본을 계속 샀는데, 그때 값은 1902년 수준이었다.
에칭 값은 1980년대에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한정판 번호는 그보다 오래 살아남아, 판이 닳을 일이 거의 없는 석판화와 인쇄 포스터에도 붙는다. 화랑에 걸린 액자 아래 연필로 적힌 23/100은 그 호황이 판화에 남긴 자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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