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그림 이야기

체코 앵포르멜...노동자 환희 그리라던 날 시멘트 짓이겨 내민 반역

물감 대신 폐자재와 모래로 만든 부조...1960년대 프라하 청년 화가들이 감행한 비공식 전시의 기록

리지

체코 앵포르멜3분

Illustration by Gemini

1960년 봄 프라하에서 미술학도 이르지 발렌타의 작업실 문이 열렸다. 공식 미술가 협회가 전시장 대관을 거부하자 청년 화가들이 이 작업실에 모여 전시를 열었다. 화가들은 캔버스에 유화 물감을 칠하는 대신 시멘트 반죽과 모래를 쏟아부었다. 그 위에 낡은 천, 철판, 철사를 짓이겨 붙인 검붉은 부조를 벽에 걸었다. 청년들은 노동자의 환희를 밝은 색채로 그리라는 당국의 요구에 거친 건축 자재를 내밀며 맞섰다.

체코 앵포르멜은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프라하 청년 화가들이 펼친 독자적인 추상 미술 운동이었다. 이들은 공산당 정권의 관제 미술과 기성 화단의 타협을 거부하고 시멘트와 폐자재로 상처 입은 인간 실존을 표현했다. 이 운동의 출발점이 된 비공식 전시의 이름은 콘프론타체였다. 당시 서유럽에서 장 뒤뷔페와 안토니 타피에스가 앵포르멜을 선보였지만 프라하 청년들의 작업은 외국 유행을 베낀 것이 아니었다. 화가들은 공산당 정권의 선전 구호뿐만 아니라 국내 화단에 머물던 온건한 모더니즘 작업도 함께 거부했다.

화가들은 붓을 내려놓았다. 붓 대신 프라하 시내의 허물어진 회벽과 고물상에서 주워 온 함석판, 모래, 철사를 재료로 썼다. 이 거친 재료들로 평면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허물었다. 당시 구하기 어렵던 접착제 아크로넥스로 이질적인 재료들을 결합했다. 널빤지 위에 흙과 돌가루를 바른 뒤 불로 그을리거나 칼로 파내고 다시 꿰매 붙이는 작업을 거듭했다.

이르지 발렌타의 <구조 판화 II>. 사진 NoJin · CC BY-SA · 위키피디아

체코 미술사학자들은 상처 입은 재료를 전체주의 사회에서 고통받는 인간의 몸을 형상화한 결과물로 설명했다. 작품 화면에 남긴 깊은 균열과 흠집은 억압 속에서 표현의 자유를 빼앗긴 예술가의 처지를 드러냈다. 죽음과 허무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인간 존엄을 지키려 한 내면의 몸부림이었다.

그해 여름 폴란드에서 열린 국제미술평론가협회 총회를 마치고 서유럽으로 돌아가던 비평가들이 이 작업실을 찾았다. 피에르 레스타니와 도라 애슈턴을 비롯한 비평가들은 서유럽의 앵포르멜이 화랑의 장식품으로 굳어가던 시기에 프라하에서 물질의 원초적 저항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전례가 없는 절망한 예술가들의 처절한 반역이었다. 비평가들은 이를 해외 미술 전문지에 소개했다.

이 작업 방식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화가들은 몇 해 뒤 공공 화랑에서 전시를 열었으나 기법이 장식으로 변질되기 전에 흩어졌다. 외세의 침공으로 모임은 와해됐다. 동료 작가인 화가 안토닌 토말리크와 판화가 블라디미르 보우드니크는 서른 안팎에 세상을 떠났다. 핵심 작가들은 망명했다. 고국에 남은 화가들은 전시 활동이 금지됐다.

알레시 베셀리의 <카디시>. 사진 NoJin · CC BY-SA · 위키피디아

물질의 표면을 긁어내고 상처를 드러내던 조형 언어는 오늘날 건축과 디자인에 남아 있다. 콘크리트 골조를 다듬지 않고 노출하는 건축 마감이나 표면을 부식시킨 포장지, 시각 그래픽 디자인이 그 방식을 이어받았다. 프라하의 작은 아틀리에에서 굳어지던 시멘트와 녹슨 철사는 1991년 프라하 시립미술관 회고전에 이르러 공공 전시장의 벽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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