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야기
공터 덮친 불도저...소비에트 미술이 감추지 못한 균열
혁명기 전위 예술의 실험과 1930년대 이후 국가의 미술 통제...지하 화가들의 공개 전시 추진

1974년 9월 15일 모스크바 남쪽 외곽 벨랴예보의 황량한 공터에서 야외 미술 전시회가 열렸으며 수정과 추가를 거친 초청장에는 화가 24명의 이름이 실렸다. 당국의 허가를 받지 못한 이 전시에서 화가들은 소련에서 제작한 미술 작품, 곧 소비에트 미술 작품을 세워놓고 관람객을 기다렸지만 소련 당국은 불도저와 살수차를 보내 전시를 강제로 해산했다. 진흙투성이 공터에서 당국이 전시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그림들이 파손됐다. 이 사건은 "불도저 전시회"라는 이름으로 기록에 남았다. 소비에트 미술에서 국가가 정한 기준을 따르지 않은 그림을 공개하는 일은 왜 진압 대상이 됐을까?
볼셰비키 혁명 직후에는 사정이 달랐다. 당시 국가의 미술 행정을 맡은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선구자로는 전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와 전위 예술가 블라디미르 타틀린이 있었다.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도 국가의 미술 행정에 참여했다. 미술평론가 니콜라이 푼닌은 1919년 사람이나 사물을 알아볼 수 있게 묘사하는 재현 방식을 부르주아 계급이 미술을 이해하는 관점과 연결해 비판했다. 당시 전위 화가들은 붉은 깃발 아래서 형상을 해체하고 기하학적 추상화를 그렸다. 전위 예술가들의 실험은 산업미술과 건축, 공간을 구성하는 작품으로도 이어져 1922년 베를린에서 열린 러시아 미술 전시에는 미래 도시와 발전소 설계, 여러 재료로 공간을 구성한 작품이 함께 나왔다.
1920년대에는 여러 미술 단체가 소비에트 미술의 방향을 놓고 경쟁했다. 1930년 무렵에는 말레비치를 비롯한 일부 전위 작가가 구상 회화로 복귀했다. 구상 회화는 사람이나 사물처럼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을 그리는 그림으로, 검은 사각형을 그리며 추상을 극단까지 추구했던 말레비치도 다시 농민의 형상을 그렸다.
말레비치의 "풀 베는 사람"에서 이러한 표현 방식의 변화를 볼 수 있다. 화면 속 농부는 수염을 기르고 원색의 기하학적 형태로 표현된 옷을 입은 채 서 있지만 이 그림은 고전적 초상화와는 다르다. 말레비치는 농부의 형상을 다시 그렸지만 묘사 방식까지 과거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작가들의 표현 방식과는 별개로 미술 조직도 바뀌었다. 1932년 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기존 문예 단체들을 해산하고 창작 분야별로 통합 조직을 만들도록 했다. 그해 6월에는 모스크바에, 8월에는 레닌그라드에 미술가들을 통합한 직능단체인 미술가동맹이 생겼다. 1957년에는 소련 전역의 미술가들을 통합한 전연방 미술가동맹이 출범했다.
1930년대 이후 국가는 공식 미술에 "사회주의 사실주의" 규범을 적용했다. 이 규범에 따라 화가들은 노동자와 농민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모습을 영웅적이고 낙관적으로 그려야 했으며 당이 제시한 발전 방향과 긍정적 인물을 강조해야 했다. 미술가동맹은 공식 전시에 출품할 작품을 심사할 때 이 규범을 적용했다. 화가들은 사람과 사물을 알아볼 수 있게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공식 전시에 참여할 수는 없었다. 다만 실제 전시에는 풍경과 정물처럼 정치적 내용보다 소재와 회화 기법에 집중한 작품도 걸렸다.
이런 통제 아래 궁정 화가 알렉산드르 게라시모프 같은 화가들은 결점 없는 지도자의 초상화를 대량으로 그렸다. 훗날 소련 지도자가 된 흐루쇼프는 회고록에서 당시 사람들이 국방인민위원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두고 국방 업무를 보는 시간보다 게라시모프의 작업실에서 모델로 서 있는 시간이 더 길다고 말하곤 했다고 전했다.
그렇다고 소비에트 미술 전체를 선전 포스터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러시아 화가 쿠즈마 페트로프-보드킨의 "정치위원의 죽음"은 내전 중 치명상을 입은 군 정치위원을 그린 작품으로, 정치위원은 부대의 정치 교육과 지도를 맡은 인물이다. 화면 앞쪽에서는 병사가 쓰러지는 정치위원을 부축하고, 뒤쪽에서는 다른 병사들이 언덕을 내려가며 전투를 이어간다.

페트로프-보드킨은 사회주의 사실주의가 국가의 미술 규범으로 자리 잡기 전인 1928년 혁명군사평의회의 주문을 받아 붉은 군대 창설 10주년 전시를 위해 이 그림을 제작했다. 그림 속에서 부축받는 정치위원의 자세를 보면 죽은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기독교 성화의 구도가 연상된다. 이 그림에 쓰인 구면 원근법에서는 지면이 둥글게 기울어져 있어 관람객은 사건을 위와 옆에서 함께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군이 주문한 혁명 이야기를 그리면서도 작가는 종교화의 구도와 독자적인 공간 표현을 함께 사용했다.
사회주의 사실주의가 국가의 미술 규범으로 자리 잡은 뒤인 1935~1960년의 전시에도 정치적 내용보다 회화 기법에 집중한 풍경화와 인물화 등이 걸렸다. 소비에트 시대 일부 화가는 꽃 정물화를 그리면서 색채와 구도 등 조형 문제를 연구했다. 이러한 사례는 화가들이 정치적 내용을 강조한 규범 아래에서도 작품의 소재와 기법을 선택할 여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 사실만으로 누구나 원하는 작품을 공개할 자유가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1953년 소련 지도자 스탈린 사후 문화 통제가 누그러진 시기인 해빙기에는 예술가들이 이전보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덜 느끼며 실험할 수 있었다. 국가가 정한 규범을 따르지 않은 예술 활동은 비순응주의 미술로 불렸다. 비순응주의 화가들은 1960~1961년에도 아파트에서 전시를 열었다.
이들이 누린 자유는 여전히 위태로웠다. 1962년 12월 1일 모스크바의 마네지 전시장에서 열린 전시회에 들른 흐루쇼프는 청년 작가들의 추상 작품에 분노해 모욕적인 폭언을 퍼부었다. 이 사건이 마네지 사건이다. 흐루쇼프의 전시회 방문 이후 당은 문화 통제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비순응주의 화가들은 아파트와 작업실에서 작업과 전시를 이어갔다. 이들은 서독의 수집가 켄다와 야코프 바르-게라 부부 같은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작품은 외교관 등의 여행 가방에 숨겨져 서방으로 반출됐다.
1970년대 중반에는 당국의 압력이 커지고 비순응주의 화가들이 제도권 전시 공간에서 작품을 공개할 기회가 거의 사라졌지만 이 화가들은 국가가 정한 규범을 따르지 않은 실험 작품을 공개하려 했다. 1974년 불도저 전시회에서 화가들은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그 작품들을 모스크바 외곽의 공터에 내걸었지만 당국은 중장비를 동원해 전시를 강제로 해산했다. 외신 기자들은 당국이 중장비로 미술 작품을 파괴하는 광경을 전 세계에 알렸다. 국제적인 보도와 비판이 이어지자 소련 당국은 2주 뒤인 1974년 9월 29일 이즈마일로보 공원에서 야외 전시를 허락했다. 소련 당국은 불도저를 동원하고도 화가들의 전시를 끝내지는 못했다.
1980년대 후반 소련 지도자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으로 표현 제한이 완화되면서 비순응주의 작가들이 공개적으로 활동할 여지도 넓어졌다.
혁명기 전위 예술가들이 추구한 기하학적 추상은 오늘의 건축에서도 볼 수 있다. 독일 바일암라인의 비트라 소방서는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해 1993년 완공한 건물이다. 하디드가 이 건물을 구상하며 그린 "비트라 소방서, 복도"에서는 콘크리트와 유리 벽면이 여러 조각으로 분리돼 비스듬히 겹친다. 자하 하디드 재단은 하디드의 이러한 표현을 말레비치가 추상 회화에서 평면의 제약을 벗어난 방식과 연결해 설명한다.
실제 소방서 건물에서도 날카로운 모서리와 비스듬한 콘크리트 면이 공간을 나눈다. 하디드는 그림에서 면을 분리하고 겹쳐 움직임을 표현하던 실험을 사람이 드나드는 건축 공간으로 발전시켰다. 비트라가 자체 소방대를 해체한 뒤 이 건물은 비트라 디자인 미술관의 전시와 행사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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