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그림 이야기

회화의 종말 선언한 로드첸코...젖꼭지 광고와 타틀린 작업복 설계

국영 기업의 시장 경쟁 속에서 제작한 광고...생활 도구 설계와 직물 생산으로 확대한 예술의 역할

리지

구성주의5분

1921년 회화의 종말을 선언한 화가 알렉산드르 로드첸코는 1923년 노리개젖꼭지 광고를 디자인했다.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재료와 기하학적 형태를 실험한 미술 운동인 구성주의에 참여한 그는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 단색 캔버스를 전시한 뒤 회화를 끝냈다고 회고했다. 로드첸코는 이 광고로 고무제품 기업 레지노트레스트의 상품을 알렸다.

국영 기업에도 광고가 필요한 사정이 있었다. 1921년 도입된 신경제정책은 제한적인 시장 경쟁을 허용했고, 국영 식료품 기업 모셀프롬도 소비자를 놓고 경쟁해야 했다. 국영 백화점 GUM 역시 로드첸코의 광고주였다. 로드첸코는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와 협업하며 스스로를 "광고 구성자"라 불렀다. 마야콥스키가 광고 문구를 쓰고 로드첸코가 디자인했다. 모셀프롬의 식용유 광고에는 "모셀프롬 외에는 없다"는 구호가 들어갔다.

구성주의 예술가들은 광고 작업으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들은 형태와 재료를 다루는 실험을 바탕으로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모색했다. 산업 생산에 참여하려는 목표는 실무 훈련의 부족과 공장 사정 때문에 제약을 받았지만 로드첸코는 광고와 출판 디자인에서 활동 영역을 넓혔다.

이런 실험의 초기 사례가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모서리 역부조"다. 타틀린은 1914년에 제작해 이듬해 전시한 이 작품에서 철과 구리, 목재, 케이블을 벽 모서리 공간에 배치했다. 그는 금속과 나무를 그림으로 재현하는 대신 실제 재료의 단단함과 유연함, 재료들이 서로 당기며 지탱하는 관계로 작품을 구성했다. 벽 모서리도 조립한 작품의 부피와 배치가 드러나는 공간이 됐다.

1920~1922년 모스크바 예술문화연구소의 논의에서 일부 구성주의 예술가들은 재료를 고르고 배치하는 실험을 산업 현장에 적용하려 했다. 이들은 이젤 회화를 포기하고 산업 생산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생산주의를 주장했다. 이들의 입장은 독립적인 추상 조형을 추구한 예술가들의 입장과 달랐다.

타틀린은 "제3인터내셔널 기념탑"에서 예술과 공학, 정치적 기능을 한 건물에 결합하려 했다. 그가 1919~1920년 설계한 탑은 공산주의 국제조직인 제3인터내셔널의 회의와 업무를 위한 공간으로 계획됐다. 타틀린은 높이 400미터의 두 강철 나선 안에 회의·집행기관·정보국을 위한 유리 공간을 두고 각각 다른 속도로 회전하도록 했다.

조각가 나움 가보는 타틀린의 기념탑 설계가 기계를 모방하는 데 그쳐 예술적 의미가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가보와 조각가 앙투안 페브스네르는 1920년 "사실주의 선언"을 발표했다. 두 사람은 조각을 덩어리로 채우기보다 면을 조립해 공간의 깊이를 드러내고 실제 움직임의 리듬으로 시간을 표현하려 했다. 이들은 조형 작업에 산업 시설의 기능을 부여하는 대신 공간과 시간을 탐구하는 작업 자체를 추구했다.

블라디미르 타틀린과 조수가 "제3인터내셔널 기념탑" 모형 앞에 선 1920년 11월 사진. 위키피디아

기념탑은 실제로 건립되지 않았다. 타틀린이 만든 원래 모형들도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전시된 모형은 1993년에 재구성한 것이다.

타틀린은 생활 도구를 설계하면서도 산업 생산에 참여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경제적인 난로와 노동자 작업복, 가구를 설계했다. 기념탑에서 국제조직의 업무 공간을 구상했다면 이 작업에서는 일상에 쓰일 물건을 설계 대상으로 삼았다.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실험에는 여성 예술가들도 앞장섰다. 바르바라 스테파노바와 화가이자 디자이너인 류보프 포포바는 모스크바 제1국립직물날염공장에서 기하학 무늬의 옷감을 디자인했다. 두 사람이 디자인한 기하학 무늬의 옷감은 실제로 생산돼 일상 의복에 사용됐다.

거리와 인쇄물에서는 직물 디자인에 앞선 내전 시기부터 예술가들이 기하학 도형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전했다. 예술가 엘 리시츠키의 1919~1920년 포스터 "붉은 쐐기로 백군을 쳐라"에서 붉은 삼각형 쐐기는 볼셰비키 혁명 세력을, 흰 원은 그에 맞선 백군을 나타낸다. 리시츠키는 붉은 쐐기가 흰 원을 파고드는 구도로 두 세력의 충돌을 표현했다. 그는 제목의 공격 명령과 도형의 움직임을 결합해 혁명 세력의 편에서 싸울 것을 촉구했다.

엘 리시츠키의 내전 시기 선전 포스터 "붉은 쐐기로 백군을 쳐라", 1919~1920년. 위키피디아

사진가 구스타프 클루치스는 신문 보도 사진과 그래픽을 합성하는 포토몽타주 기법을 개척했다. 이들이 만든 기하학 활자와 사진 몽타주는 국가의 이념을 전하는 시각 언어로 쓰였다. 포스터와 인쇄물은 대중의 행동을 촉구하는 도구였다.

하지만 예술가들이 독립적으로 새로운 조형 방식을 실험할 여지는 줄어들었다. 1920년대 후반 구성주의 예술가들의 후원자였던 레온 트로츠키가 실각한 뒤 구성주의는 당국의 의심을 받았다. 로드첸코도 1930년대에 내용보다 형태와 표현 방식에 치중한다는 뜻의 형식주의라는 비난을 받았다.

1934년 작가대회에서는 사회주의 사실주의가 공식 교리로 공표됐다. 당국은 회화에서 소비에트 생활을 사실적인 방식으로 낙관적으로 묘사하도록 요구했다. 이런 표현의 요구와 통제 속에서 독립적인 조형 실험의 여지는 좁아졌지만, 일부 예술가의 그래픽 작업은 국가의 선전 안에서 이어졌다. 클루치스는 스탈린 체제의 공식 포스터를 제작했고, 구성주의적 디자인은 국가 잡지에서도 사용됐다.

해외 교류는 소련 내 활동이 위축되기 전부터 진행됐다. 1922년 독일에서 활동한 리시츠키는 유럽 예술가들과 교류했고, 출판과 전시를 함께 만드는 작업을 통해 구성주의의 조형 방식을 전했다. 가보도 1922년 베를린으로 이동해 제1회 러시아 미술 전시의 조직에 참여했다. 예술가의 이주와 공동 작업은 이 실험을 국경 밖에서도 이어 가게 했다.

후대의 음반 재킷에서도 구성주의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디자이너 매슈 쿠퍼가 만든 프란츠 퍼디난드의 2005년 앨범 "You Could Have It So Much Better" 재킷은 로드첸코의 1924년 출판 광고를 재해석했다. 쿠퍼는 손을 입에 대고 외치는 릴리야 브리크의 사진과 기하학 도형, 활자를 결합한 구도를 차용했다.

이 앨범은 2025년 발매 20주년을 맞아 다시 출시됐다. 구성주의자들이 산업 생산에 예술을 참여시키려던 목표는 음악을 알리는 이 재킷의 용도와 다르다. 레지노트레스트의 생활용품 광고를 만들었던 로드첸코가 사진과 도형, 활자로 메시지를 전한 방식은 음반 포장에도 활용됐다. 책을 외치던 광고 문구의 자리에 이 재킷에는 밴드 이름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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