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야기
서예의 글자를 현대 미술로 바꾼 후루피야
추상 회화부터 문자 조각까지...글자의 형태와 의미를 살린 현대 조형

파키스탄 카라치의 프레어 홀이라는 건물 천장에는 화가 사디콰인이 그린 "땅과 하늘"이라는 뜻의 문구가 크게 펼쳐져 있다. 글자의 크기와 배치가 벽화의 구성을 이루면서 문구의 뜻도 남아 있다. 이처럼 전통 이슬람 서예의 문자 형태를 현대 미술의 작품 구성에 활용한 미술 운동을 후루피야(Hurufiyya)라고 한다.
전통 이슬람 서예에서는 글자의 비례를 지키는 일이 중요했고, 서예가는 스승 밑에서 여러 해 기술과 규칙을 배웠다. 경전 필사에서는 문장을 정확하고 또렷하게 전달해야 했으며, 시와 격언을 쓰거나 글자를 장식에 활용하는 일도 서예의 오랜 용도였다.
후루피야 작가들은 이 서예 전통에서 글자의 형태를 가져와 추상 회화와 조각의 구성에 활용했다. 후루피야라는 이름은 글자들을 뜻하는 아랍어 후루프(huruf)에서 유래했다. 아랍권의 실험과 함께 이란과 파키스탄에서도 문자를 현대 미술에 접목하는 작업이 나타났다.
초기 문자 실험은 1940년대부터 나타났고, 후루피야는 20세기 후반 여러 지역에서 전개됐다. 탈식민화와 문화적 정체성 탐색은 이 운동의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었다. 작가들은 국제적인 현대 미술과 지역의 문자 전통을 함께 다뤘으며, 여행과 망명, 국제 교류도 작업의 조건을 이루었다. 이들이 모두 같은 시기에 독립을 맞거나 같은 동기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초기 실험에 나선 이라크 여성 화가 마디하 오마르는 1949년 미국 워싱턴에서 아랍 문자를 추상 요소로 활용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 전시에는 문자를 추상 회화에 활용하자는 선언 성격의 설명문이 함께 제시됐다. 오마르는 개별 글자를 단어로 잇지 않고 굽거나 말린 형태로 구성해 글자 자체의 선과 표현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여러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나타났다. 서로의 작업을 아는 작가가 적었던 경우도 있었고, 지역별 재료와 양식에 따라 다른 형태의 문자 미술이 전개됐다. 하나의 중심에서 정한 표현법이 모든 지역에 그대로 퍼졌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수단의 하르툼 학파는 가죽과 목재를 재료로 삼아 서예에 아프리카 전통 문양을 접목했다. 모로코에서는 헤나 염료와 직조 등 전통 재료와 기법을 활용했다. 문자를 현대 미술에 활용하는 작업은 글자의 형태뿐 아니라 그 글자를 표현하는 재료에서도 지역별로 차이가 있었다.
오마르가 개별 글자를 단어로 잇지 않고 구성했듯, 일부 추상 작업에서는 작가들이 문자를 단어나 문장으로 읽는 기능을 약화하고 글자의 선과 형태를 감상과 해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위키피디아의 사조 해설에서 다시 인용한 미술사학자 크리스티아네 트라이힐(Christiane Treichl)은 이런 작업에서 글자의 본래 의미를 잠시 배제하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진다고 설명한다. 후루피야에는 전통 서예의 규칙을 지키는 유형과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추상 서예도 있다. 따라서 글자의 형태를 변형했다는 사실만으로 작품의 메시지까지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다.
파키스탄 화가 사디콰인의 프레어 홀 천장 벽화에서는 뜻을 가진 문자가 회화 요소와 결합한다. 사디콰인은 1986년 카라치의 프레어 홀에서 이 벽화를 작업했다. 천장에는 "땅과 하늘"을 뜻하는 문구인 아르즈오사마와트(Arz-o-Samawat)가 크게 쓰여 있다. 문구의 뜻을 유지하면서 글자의 크기와 배치가 넓은 천장의 시각적 구성에 참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벽화 작가 사디콰인, 사진 Madiha Naqsh Siddiqui. 위키미디어 공용 파일 설명, CC BY-SA 3.0.
문자 활용은 도예와 조각에서도 나타났다. 요르단의 도예가 마무드 타하는 도예에 서예와 경전 구절을 결합했다. 이란의 조각가 파르비즈 타나볼리는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는 페르시아어 히치(Heech)를 입체로 제작했다. 타나볼리의 히치 조각은 신이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한다는 수피 사상과 연결되며, 단어의 뜻도 작품 해석의 근거로 남는다.
후루피야에는 정규 서예 훈련을 전제로 삼지 않고 작가 자신의 필체를 현대적 구성에 활용하는 유형도 있다. 전통 서예의 규칙을 지키는 작업과 자유로운 필체를 활용하는 작업은 이 운동 안의 서로 다른 표현 방식이다. 이러한 양식 분류가 회화에서 조각을 거쳐 거리 미술로 나아가는 발전 순서를 뜻하지는 않는다.
오늘날의 거리 미술에서도 글자 형태를 활용한 구체적인 사례를 볼 수 있다. 튀니지계 예술가 엘 시드는 서예 전통과 도시 미술을 접목한 캘리그라피티(calligraffiti) 작업을 세계 여러 곳에서 선보인다. 엘 시드는 작업하는 지역의 작가와 시인, 철학자의 언어에서도 문구를 가져와 색과 글자를 겹쳐 구성하면서 평화와 공존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작품들에서 문자는 화면의 선을 이루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능도 한다.
작품 엘 시드, 사진 Rani777. 위키미디어 공용 파일 설명, CC BY-SA 4.0.
엘 시드는 제품 디자인에서도 문자를 활용했다. 엘 시드는 2013년 루이비통의 실크 스카프 협업에서 시인 타하 무함마드 알리의 시 "베네치아 카니발"에 나오는 시구를 디자인에 담았다. 이 스카프에는 글자의 곡선이 브랜드의 모노그램 무늬와 겹쳐 배치됐다. 아랍어를 읽지 못하는 관람객이 선과 색을 감상하더라도 작품에 사용된 시구의 뜻은 유지된다.
전통 서예에서 익힌 글자의 형태는 추상 회화와 천장 벽화, 문자 조각과 거리 작품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쓰였다. 일부 작업은 글자의 뜻을 일시적으로 배제했고, 다른 작업은 경전 구절이나 시구의 의미를 유지했다. 엘 시드의 실크 스카프에도 시구와 글자의 곡선, 브랜드의 모노그램 무늬가 함께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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