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야기
식당 벽에서 재발견된 명화, 카라바조파의 어둠과 빛
공방도 이론서도 없이 유럽에 확산한 화풍...명암으로 표현한 성서 속 몸싸움과 촛불 아래 술자리

1990년 아일랜드 더블린의 한 예수회 공동체 식당에는 유화 "그리스도의 체포"가 걸려 있었다. 이 그림은 18세기 후반부터 네덜란드 화가 헤릿 판 혼트호르스트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그해 8월 식당을 찾은 아일랜드 국립미술관 수석 복원사 세르조 베네데티는 변색된 바니시 아래 그림의 주제와 구도를 보고 카라바조의 작품일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후 3년간 연구와 분석, 전문가 자문과 보존 처리가 이어졌다. 아일랜드 국립미술관은 카라바조의 진품으로 확인된 이 그림을 1993년 전시에서 공개했다.
그림 속에서는 유다가 입맞춤으로 예수를 지목하고 경비병들이 예수를 붙잡으려 한다. 왼쪽의 사도 요한은 달아난다. 빛을 받은 갑주와 얼굴, 좁은 화면에 밀착한 인물들을 통해 체포 순간의 긴장을 느낄 수 있다.
혼트호르스트는 카라바조파에 속한 화가였다. 카라바조파는 17세기 초 카라바조의 명암법과 사실주의 화풍을 따른 유럽 화가들을 일컫는다. 카라바조는 공방이나 화풍을 전수하는 공식 학교를 설립하지 않았고 예술 철학을 정리한 이론서도 남기지 않았다.
1606년 5월 카라바조는 로마에서 결투 끝에 라누초 토마소니를 살해했다. 이후 사형 선고를 피해 나폴리로 피신했다. 그가 나폴리에서 그린 "자비의 일곱 가지 일" 등은 현지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화가들은 짙은 어둠과 집중된 빛을 대비시키는 명암법에 매료됐다. 이 명암법은 미술계에서 테네브리즘이라고 부르는 기법이다.
카라바조에 앞선 매너리즘 미술에서는 인체의 비례를 길게 늘이거나 자세를 복잡하게 비트는 등 인위적이고 과장된 표현이 발달했다. 반면 카라바조는 성인을 그릴 때도 거지와 매춘부 같은 현실의 인물을 모델로 삼았다. 그가 그린 성인의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고 발바닥에는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카라바조의 빛 활용 방식도 달랐다. 그는 배경을 짙은 암흑으로 채우고 좁은 틈으로 들어오는 듯한 빛으로 인물의 거친 손과 근육을 선명하게 비췄다.
카라바조는 이상화된 성인의 모습보다 현실의 인간이 겪는 절박한 순간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명암의 대비와 사실적인 인물 표현으로 종교적 장면에 생생한 긴장감을 더했다.
로마에서는 화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와 그의 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카라바조의 명암법을 받아들였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에서는 유디트가 칼로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동안 하녀가 그의 몸을 눌러 붙잡는다. 유디트는 자신의 도시를 포위한 홀로페르네스를 죽여 도시를 구한 성서 속 인물이다. 어두운 배경 앞에서 두 여성의 팔과 남자의 몸, 피 묻은 흰 침대보는 밝게 표현됐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명암으로 두 여성이 함께 가하는 물리적인 힘을 부각하며 성서 속 사건을 눈앞의 격렬한 몸싸움으로 묘사했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는 카라바조의 화풍이 독창적으로 변모했다. 17세기 초 이탈리아에 머문 화가 헨드릭 테르브뤼헌과 헤릿 판 혼트호르스트 등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이들은 카라바조의 작품을 연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위트레흐트 카라바조파를 형성했다.
더블린 식당에 걸린 그림의 작가로 잘못 알려졌던 혼트호르스트도 이 유파에 속했다.
혼트호르스트는 종교화에 사용되던 명암법을 세속의 밤 풍경에 적용했다. 그는 어두운 탁자 위의 촛불로 사람들의 웃는 모습과 술잔, 악기 연주 장면을 비추는 야경화를 선보였다. 밤 장면을 즐겨 그려 "밤의 헤라르도"라는 별명도 얻었다.

카라바조의 기법을 받아들인 화가들은 술자리와 카드놀이를 묘사할 때도 강한 명암을 활용했다. 이들은 이렇게 소재와 표현의 범위를 넓혔다.
카라바조가 1610년 포르토 에르콜레에서 38세로 숨진 뒤에도 추종 화가들의 활동은 수십 년간 이어졌다. 다만 유파의 전성기가 끝난 시기는 지역마다 달랐다.
위트레흐트에서는 주요 화가들이 세상을 떠나거나 화풍을 바꾸면서 1630년 무렵 전성기가 끝났다. 혼트호르스트는 궁정화가로 활동하며 초상화와 우화적인 그림으로 명성을 얻었다. 나폴리의 카라바조파는 1656년 페스트로 큰 타격을 받았다.
17세기 중엽에는 이상화된 고전주의 회화를 선호하는 취향이 우세해지면서 유럽의 카라바조파가 쇠퇴했다. 카라바조 자신의 평판도 이후 오랫동안 낮아졌다. 그의 그림 중에는 "그리스도의 체포"처럼 추종 화가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진 사례도 있었다.
20세기 들어 이탈리아 미술사학자 로베르토 롱기는 카라바조와 추종 화가들의 관계를 연구했다. 롱기는 1951년에는 밀라노에서 카라바조와 카라바조파를 다룬 전시를 열었고 이듬해 카라바조 단행본을 출간했다. 이처럼 카라바조를 재평가하는 과정에서는 그의 작품과 그 화풍을 받아들인 화가들을 함께 살폈다.
명암으로 인물에게 시선을 집중시키는 방식은 영화 "대부"의 실내 장면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촬영감독 고든 윌리스는 갈색과 검은색을 중심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때로는 화면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에 두려 했다고 설명했다. 회화와 영화에서는 어둠에 잠긴 배경과 선택적으로 부각되는 인물을 통해 공통으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영화 첫머리의 집무실 장면에서는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이 돈 코를레오네의 얼굴을 비추는 반면 그의 눈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다. 관객은 그의 표정을 온전히 읽기 어렵다. 영화는 이 어두운 집무실과 야외의 환한 결혼식 장면을 번갈아 보여 주며 같은 날의 두 공간에 서로 다른 분위기를 조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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