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흐름
바다의 공짜 도로는 끝났다, 호르무즈에 걸리는 14세기 쇠사슬
이란·오만 임시항로 개설과 美 안보 비용 청구...1857년 폐지된 해협 통행세의 21세기 귀환

독일 카우프 인근 라인강 한가운데에는 1327년 세워진 바위섬 성채 팔츠그라펜슈타인이 서 있다. 성채의 주된 쓰임은 강을 오가는 배에서 통행료를 거두는 일이었다. 강 양쪽에 굵은 쇠사슬을 걸어 지나가는 배를 멈추고 운임과 화물에 세금을 물렸다. 길목을 가로막은 채 지나간다는 이유로 통행세를 거두던 이 중세의 관행은 1857년 3월 코펜하겐 조약에 이르러서야 끝났다. 16개 해운국이 덴마크에 3,350만 릭스달러를 냈다. 덴마크가 428년간 거두어 온 통행세이자 북해에서 발트해로 드나드는 길목인 외레순 해협의 통행료는 영구 폐지됐다. 바다의 주요 병목을 통행료 없는 국제 공공재로 쓰자는 원칙을 세운 순간이었다.
해상 통과통항권은 그 원칙을 법 조문으로 확립한 제도다. 1982년 유엔 회원국들이 바다의 경계와 이용 규칙을 정해 체결한 유엔해양법협약 제3부에 담긴 권리로, 해협을 낀 연안국이 지나가는 배를 가로막거나 통행 요금을 물리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이 원칙은 1982년 체결된 유엔해양법협약 제3부로 완성됐다. 해상 통과통항권은 어느 나라의 영해에도 속하지 않는 바다인 공해, 그 공해와 공해를 잇는 국제 해협을 지나는 모든 선박에 해협과 국토가 맞닿은 나라인 연안국이 통항을 막거나 요금을 물리지 못하도록 보장한 권리다. 협약 제44조는 연안국이 선박의 통항을 방해하거나 멈추지 못한다고 못 박았다. 제26조는 단순 통항만을 이유로 과징금을 부과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지난 80년 동안 세계 무역은 바닷길을 무료로 이용해 왔다. 미국 해군이 바다를 순찰하고 국제법이 통행세를 금지했다. 해운사는 연료비와 보험료만 내고 전 세계 해협을 자유롭게 오갔다.
그런데 최근 이 170년 묵은 해양 질서의 바닥에 거대한 균열이 생겼다. 지난 8월 25일 이란과 오만은 분쟁으로 막힌 호르무즈 해협에 임시 공동 항로를 개설하기로 합의했다. 양국은 기뢰 제거를 이유로 선박의 운항 경로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란과 오만은 향후 영구 항로 협상까지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미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미 행정부는 호르무즈 해협의 해상 안보를 제공하는 대가를 치르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연안국은 통제권을 쥐려 하고 해양 패권국은 보호 비용을 청구하겠다고 나선 격이다.
호르무즈 해협은 결코 평범한 물길이 아니다. 해협의 가장 좁은 폭은 39㎞다. 유조선이 지나는 실제 항행 통로는 왕복 각각 3.7㎞ 너비의 좁은 바닷길이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이 좁은 병목을 지나는 원유와 석유제품은 하루 평균 2,000만 배럴에 이른다. 전 세계 해상 원유 수송량의 30%가 이곳을 통과한다. 세계 석유 소비량의 20%를 차지하는 물량이 이 좁은 길목 하나에 매달려 있다. 바다의 가장 굵은 동맥에 다시 요금소가 들어설 조짐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연안국의 입장에서는 해협 관리와 안보 유지에 막대한 비용이 드니 통항 선박이 이를 분담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미 해군 역시 막대한 국방 예산을 들여 타국의 에너지 수송로를 무료로 지켜줄 이유가 없다고 반박한다. 수익자 부담 원칙에 비추어 보면 그럴듯하게 들리는 논리다.
하지만 해상 병목에 붙는 요금은 지리적 독점을 지렛대 삼아 챙기는 경제적 지대(rent)에 가깝다. 일단 한 연안국이 해협에 안전보증금이나 이용료를 물리기 시작하면, 말라카와 바브엘만데브, 수에즈를 둘러싼 연안국들도 저마다 요금 징수에 나설 수 있다. 통로마다 주인이 나타나 통행세를 거두면 전체 물동량이 급격히 줄어든다. 물류가 마비되는 경제학의 "반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anticommons)"이 바다 위에서 현실로 나타난다.
이 변화의 청구서가 가장 무겁게 날아드는 곳은 한국이다. 한국석유공사 페트로넷에 따르면 한국의 중동산 원유 수입 의존도는 72% 안팎이다. 도입하는 천연가스(LNG) 물량의 30%가량도 호르무즈 해협을 거쳐 들어온다. 한국은 바다의 자유 통항이라는 무상 공공재에 기대어 중화학공업과 수출 주도 성장을 이뤄냈다. 해협 통행이 유료화되거나 억류 위험에 따른 전쟁위험할증료가 운임에 굳어지면, 그 비용은 고스란히 국내 정유사와 발전소, 제조업의 제조원가 부담으로 이어진다.
다음 분기에 눈여겨볼 지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란과 오만이 추진하는 신규 영구 항로 협상에서 선박 안전관리비나 통항 보증금 명목의 과징금 조항이 문서화되는지 여부다. 다른 하나는 미 해군 연합 해상 안보 체계가 호르무즈 통항 선박을 대상으로 공식적인 안보 분담금을 요구하고 나서는 시점이다. 이 두 지표가 현실이 된다면 해상 운송 비용의 기준선은 영구적으로 높아진다.
1857년 코펜하겐 조약이 덴마크 해협의 쇠사슬을 끊어낸 뒤 세계 경제는 170년간 무상 항행의 풍요를 누렸다. 바다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전제 위에 현대 공급망의 정밀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갔다. 하지만 그 질서를 떠받치던 패권의 우산이 걷히자, 연안국과 강대국은 기다렸다는 듯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700년 전 라인강의 바위섬에 걸려 있던 팔츠그라펜슈타인의 쇠사슬이 21세기 바다 한가운데 유령 요금소가 되어 다시 드리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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