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세상의 흐름

89년 만에 공장 닫는 폭스바겐...스스로 밟은 "부채 브레이크"

폭스바겐 4개 공장 폐쇄 검토와 10만명 감원...헌법상 재정 준칙에 갇힌 독일 제조업의 역설

리지

부채 브레이크5분

Illustration by Gemini

독일 북부 니더작센주 볼프스부르크 폭스바겐 본사 공장의 조립 라인. 작업자가 차체 바닥의 나사를 조여 검은색 고무 "브레이크 페달"을 장착한다. 달리는 차의 속도를 줄이고 위험한 폭주를 막기 위해 운전석 아래에 단단히 고정하는 핵심 부품이다. 89년간 이 거대한 공장은 그렇게 완성된 내연기관 자동차를 전 세계 도로 위로 실어 날랐다.

영원할 것 같던 공장의 바퀴가 멈춰 서고 있다. 폭스바겐 감독이사회는 독일 국내 4개 공장의 대체 활용과 폐쇄를 검토하고 최대 10만명에 달하는 인력을 감축하는 구조조정 계획을 승인했다. 1937년 창사 이래 89년 만에 처음으로 안방인 독일에서 공장 문을 닫는 수순이다. 1994년 노사가 맺었던 30년 고용 보장 협약도 깨졌다.

독일 경제의 심장인 완성차 산업 전체가 얼어붙었다. 폭스바겐, 메르세데스벤츠, BMW 등 독일 완성차 3사의 합산 시가총액은 2015년 말 2,358억달러에서 올해 상반기 1,305억달러로 44.7% 줄었다. 도요타에 이어 글로벌 2·3·4위를 휩쓸던 독일 차 3사의 기업가치는 모두 합쳐도 현대차그룹(1,162억달러)과 엇비슷한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독일은 유럽 경제를 이끄는 독보적인 견인차였다. 2003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노동 개혁 이후 독일은 막대한 무역 흑자를 내며 "유럽의 환자"라는 오명을 벗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16년 집권기 동안 독일의 번영을 지탱한 기둥은 분명했다. 러시아에서 파이프라인으로 들어온 저렴한 천연가스와 중국의 폭발적인 산업화가 이끈 고성능 디젤차 수출이 번영의 두 축이었다.

독일은 넘쳐나는 수출 흑자 속에서 2009년 국가 재정에 강력한 헌법적 제동장치를 걸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연방 기본법 제109조와 제115조를 개정해 연방정부의 구조적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0.35% 이내로 엄격히 묶는 "부채 브레이크"를 도입했다. 새 빚을 내지 않고 흑자를 남기는 재정 운용은 독일 경제의 도덕적 원칙이자 세계의 모범으로 꼽혔다.

하지만 독일의 호황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조건 위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노르트스트림 가스관이 끊기자 공장들은 치솟는 에너지 비용을 떠안았다. 한때 독일의 최대 수출 시장이던 중국은 배터리와 전기차 기술을 내재화하며 독일의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로 떠올랐다. 폭스바겐의 중국 판매량은 2019년 423만대에서 지난해 269만대로 36.4% 줄었고 올해 상반기에도 26% 감소했다.

공장 엔진이 식어가고 산업의 전면적 전환이 절실한 순간, 15년 전 스스로 걸어 잠근 "브레이크 페달"이 독일의 발목을 잡았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지난해 11월 정부가 코로나19 비상 채무 잔액 600억유로를 기후변화대응기금으로 전용한 조치가 헌법상 부채 브레이크를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에너지 전환, 반도체 설비 유치, 전력망 구축에 투입하려던 예산이 하루아침에 묶였다.

결과적으로 독일은 산업 전환을 위한 대규모 공공 투자의 발이 묶였다. 독일 철도의 정시 운행률은 60%대로 떨어졌고 수천 개의 고속도로 교량이 노후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첨단 전력망과 데이터센터 등 미래 산업의 혈관이 되어야 할 인프라 투자가 재정준칙에 걸려 멈춰 섰다. 국제통화기금(IMF) 집계에 따르면 독일 경제는 2023년 -0.3% 역성장한 데 이어 올해도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제적 무력감과 공장 폐쇄의 공포는 정치적 극단주의의 연료가 됐다. 지난 9월 치러진 옛 동독 지역 선거에서 극우 독일대안당(AfD)은 튀링겐주에서 32.8%를 얻어 2차 대전 이후 극우 정당 최초로 주의회 1당에 올랐고 작센주에서도 30.6%로 2위를 차지했다. 동독 지역 청년층의 38%가 기성 정당을 외면하고 외국인 대량 추방과 유럽연합 탈퇴를 주장하는 극우 세력에 표를 던졌다.

산업 전환을 위해 가속 페달을 밟아야 할 결정적인 시점에 정부는 헌법의 제동장치에 발이 묶여 유권자의 불안을 달랠 재정 수단을 상실했다. 올라프 숄츠 연립정부는 지출 삭감을 둘러싼 내부 갈등으로 마비됐고 성난 민심은 체제를 무너뜨리겠다는 포퓰리즘으로 쏠렸다. 국가부채를 줄여 미래 세대를 위한다던 헌법 규정이 정작 미래 세대의 일자리를 없앨 정치를 불러오는 역설을 낳았다.

물론 부채 브레이크가 국가 파산을 막고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최후의 안전판이라는 반론은 만만치 않다. 독일의 국가채무비율은 GDP 대비 63% 수준으로 미국(120%대)이나 프랑스(110%대)보다 월등히 낮다. 부채 준칙을 완화해 나랏빚을 늘리면 국채 금리가 뛰고 국가 신인도가 흔들려 더 큰 재정 위기를 부를 수 있다는 우려다. 헌법재판소 판결 역시 미래 세대에 빚을 전가하지 말라는 법치주의 원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 반론에는 제조업 생태계가 한 번 무너지면 다시 복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빠져 있다. 기술 패러다임이 내연기관에서 소프트웨어와 전동화로 넘어가는 격변기에는 국가 차원의 대규모 전력망과 보조금이 민간 투자를 유인하는 마중물이 된다. 공장이 문을 닫고 기술 주도권을 빼앗긴 뒤에 남는 재정 건전성은 아무런 생산 능력이 없는 텅 빈 금고에 지나지 않는다.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의 요아힘 나겔 총재조차 생산적 인프라 투자를 위해 부채 브레이크 개정을 요구하고 나섰을 정도다.

한국의 고민도 이 지점에서 독일과 정확히 겹친다. 한국의 제조업 비중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2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 가운데 독일(20%)을 웃도는 압도적 1위다. 자동차, 배터리, 석유화학, 철강으로 이어지는 주력 수출 포트폴리오도 독일과 판박이다. 중국의 내수 자급과 저가 공세로 31년 만에 대중국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선 충격 역시 독일이 겪은 궤적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 나랏빚 1,300조원 돌파와 세수 결손이 겹치자 한국에서도 재정의 빗장을 걸어야 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다. 14일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둔 이형일 경제부총리 후보자는 서면답변서를 통해 적극재정을 펴면서도 국가채무 증가를 억제할 "재정준칙"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관리재정수지 적자를 GDP의 3% 이내로 법률에 묶어 재정 건전성을 관리하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한국은 지금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를 위한 대규모 전력망 구축, 반도체 클러스터 용수 공급, 에너지 전환이라는 막대한 기반 시설 투자를 눈앞에 두고 있다. 민간 기업이 홀로 감당할 수 없는 국가 기간망 구축의 시기에 정부가 재정준칙이라는 획일적 제동장치에 스스로 발을 묶는다면 한국 제조업 역시 독일이 걸어간 설비 공동화와 기술 지체라는 함정을 피하기 어렵다.

앞으로 눈여겨볼 대목은 두 가지다. 첫째는 독일 연방의회가 부채 브레이크 개정안을 발의하고 인프라 현대화를 위한 특별기금에 합의할지 여부다. 헌법상 적자 한도인 GDP 0.35%에 예외를 두거나 미래 투자 지출을 분리하는 타협안이 통과된다면 독일 경제는 산업 전환의 실탄을 확보하겠지만 정치적 교착이 이어진다면 공장의 탈출 속도는 더 빨라질 수밖에 없다.

둘째는 한국 국회에서 논의될 국가재정법 개정안의 재정준칙 설계 방식이다. 관리재정수지 적자 한도를 기계적으로 법제화하는 과정에서 국가 기간 전력망이나 미래 연구개발(R&D) 같은 전략적 투자 지출에 숨통을 열어두는 예외 조항이 담기는지가 관건이다. 제동장치의 유연성이 한국 제조업의 전환 속도를 결정짓는 기준이 된다.

볼프스부르크 공장 바닥에 단단히 조여 둔 "브레이크 페달"은 원래 차가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였다. 하지만 가파른 혁신의 언덕길에서 엔진 출력을 끄고 제동장치만 움켜쥔 결과는 체제 전체의 역주행이었다. 멈춰 선 바퀴 아래서 일자리를 잃은 사회는 가장 위험한 정치적 분노를 연료 삼아 질주하고 있다. 독일 연방통계청은 2분기 GDP가 전 분기 대비 0.1% 감소했다고 집계했다. 폭스바겐은 독일 내 4개 공장의 대체 활용 방안 검토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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