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세상의 흐름

버스비 0원의 함정...배차 헐어낸 공짜표가 승용차를 키웠다

탈린 6년 만에 유료화 복귀...서울 준공영제 3조 투입, 승용차 전환 1% 불과에 배차 벌어져 자가용 고착

리지

무상교통5분

Illustration by Gemini

시내버스 앞문 계단을 오르면 운전석 옆에 놓인 승차 단말기가 승객을 맞는다. 교통카드를 대면 단말기 화면에 잔액과 운임이 스쳐 지나간다. 버스 단말기는 단순히 승객의 요금을 거두는 기계에 그치지 않는다. 단말기에 찍히는 운임은 버스가 내일 아침에도 차고지를 나와 정류장으로 향하게 하는 동력이자, 타이어를 교체하고 연료를 채우며 운전기사에게 월급을 건네는 최소한의 버팀목이다. 그런데 지난 십여 년간 전 세계 도시와 정치권은 이 단말기에서 숫자를 지우는 실험에 경쟁하듯 뛰어들었다. 요금을 0원으로 만들면 시민들이 자가용을 버리고 버스로 갈아타 도심 매연과 정체가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가 확산됐다. 운임을 지운 버스가 도로 위에서 실제로 무엇을 남겼는지 점검할 때다.

대중교통 무료화라는 실험은 기후 위기와 불평등 완화라는 매력적인 구호 아래 닻을 올렸다. 에스토니아가 가장 먼저 출발선에 섰다. 2013년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은 전 주민을 대상으로 세계 최초로 버스 전면 무료화를 도입했고, 몇 해 뒤 서유럽의 부국 룩셈부르크도 트램과 기차, 버스 요금을 전면 무료화하며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정치인들은 요금을 0원으로 낮추면 자동차 중심 도시가 대중교통 중심으로 단숨에 바뀔 것이라고 선언했다. 무료 승차권 한 장이면 서민 가계를 돕고 탄소 배출까지 한꺼번에 줄일 수 있다는 청사진에 환호가 이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통계에 드러난 현실은 정반대다. 교통 연구진이 탈린의 대중교통 무료화 정책을 다년간 추적 조사한 결과는 초라했다. 무료화 이후 대중교통 이용객 수는 14% 늘어났지만 도로 위 승용차 교통량 감소폭은 1.2%포인트에 그쳐 자가용을 두고 버스에 오른 운전자는 사실상 없었다. 요금이 사라진 자리는 원래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던 근거리 보행자가 차지했다. 탈린의 보행 분담률은 무료화 직후 12%에서 7%로 40% 넘게 급감했고 한두 정거장을 걷던 시민들이 일제히 버스로 몰려들면서 출퇴근길 차내는 극심한 혼잡을 빚었다. 룩셈부르크의 성적표도 다르지 않다. 해마다 8억 유로의 나랏돈을 쏟아붓고 있지만 인구 1,000명당 승용차 등록 대수는 680대로 유럽 연합 최고 수준이며 전체 출퇴근 통행 가운데 승용차 비중도 60%를 웃돌아 국경 통근길의 병목은 풀리지 않았다.

물론 대중교통 요금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의 명분도 뚜렷하다. 요금을 0원으로 낮추면 취약계층과 청년, 노인의 이동권을 보장해 실질소득을 보전하는 복지 혜택이 생긴다는 설명이다. 승용차 이용자를 버스로 끌어들이는 효과가 크지 않더라도 도로 위 탄소 배출을 줄이겠다는 정책 신호를 사회에 보낼 수 있다고 본다. 복지와 기후라는 두 축을 동시에 세우는 데 재정 투입은 아깝지 않은 투자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요금 무료화 주장은 운전대를 쥔 시민들이 이동 수단을 고르는 실제 유인을 놓치고 있다. 승용차 운전자가 매달 유류비와 주차 요금을 감수하면서 도로로 나오는 이유는 버스 요금 1,500원과 무관하다. 원하는 시간에 집 앞까지 이동할 수 있는 시간 가치와 정시성을 사기 위해서다. 교통 실증 연구에서 대중교통 요금의 가격탄력성은 -0.2에서 -0.3 안팎으로 지극히 낮아 요금을 전액 감면해도 승객 유입 효과는 크지 않다. 반면 배차 간격과 이동 시간에 반응하는 서비스 탄력성은 -0.7에 달한다. 운전자들은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정류장에서 기다리기 싫어서 승용차를 탄다. 요금을 0원으로 낮추는 정책은 자가용 운전자의 선택 기준을 바꾸기 어렵다.

진짜 파국은 단말기에서 운임이 사라진 다음부터 시작된다. 승차 단말기에서 들어오던 현금 흐름이 끊기면 버스 회사는 지자체 세금 보조금에 생존을 맡기는 공공 출납창구로 변한다. 하지만 지방재정의 곳간은 마르지 않는 샘이 아니다. 세수가 줄고 인건비와 유류비가 급등하면 지자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대중교통 적자를 감당하기 어렵다. 재정 압박에 부딪힌 버스 회사는 결국 운행을 줄이는 감차를 택한다. 유류비를 아끼기 위해 버스 배차 횟수를 줄이고, 수익이 나지 않는 새벽 첫차와 심야 버스, 외곽 노선부터 정리한다. 요금을 공짜로 만들어준 대가로 배차 간격이 두세 배로 늘어나는 순간 시간을 아끼려던 시민들은 버스를 버리고 다시 운전대를 잡는다. 요금을 0원으로 지워준 정책이 역설적으로 대중교통의 유일한 경쟁력인 배차 빈도와 정시성을 갉아먹으며 자가용 의존도를 더 굳히는 구조다.

무료 대중교통을 시험했던 유럽은 이미 이 역설의 청구서를 받아 들고 돌아섰다. 에스토니아는 전국 11개 군 지역으로 넓혔던 농어촌 무료 버스를 6년 만인 2024년 전격 폐지하고 편도 1.50유로의 기본요금을 다시 거두기 시작했다. 에스토니아 지역농림부는 무료 운임 정책이 서비스 질을 망가뜨리고 이동성을 떨어뜨렸다고 인정했다. 독일 역시 월 49유로에 전국 대중교통을 타는 도이칠란트티켓을 내놓았지만 1년 만에 재정 한계에 부딪혔다. 연방과 주정부가 해마다 30억 유로의 보조금을 쏟아부었음에도 운송업계 적자가 불어나자 각 주 교통장관들은 가격을 58유로로 올린 데 이어 올해는 63유로까지 인상했다. 요금을 억누른 채 세금으로 버티는 방식은 영속할 수 없다는 방증이다.

이 거대한 부메랑은 한국 도로 위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서울시는 시내버스 준공영제를 도입한 이래 64개 업체의 운송 적자를 시 예산으로 보전해 왔다. 서울시가 최근 5년간 버스회사에 지원한 재정지원금만 총 3조 165억원에 달하고 지난해에만 4,575억원의 혈세가 투입됐다. 하지만 대법원의 통상임금 판례 변경으로 64개 업체에 청구된 소송액은 1조 216억원으로 증가했다. 여기에 노조의 임금 인상 요구안까지 반영할 경우 연간 5,394억원의 인건비가 추가로 필요하다.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에 몰린 시내버스 업체는 현금을 확보하겠다며 서울시에 차량 50대의 감차를 신청했고 감차가 승인되면 대당 8,000만원의 보상금을 받지만 그 대가로 배차 간격은 벌어진다.

버스 무료화를 내걸었던 한국의 지방자치단체들도 줄줄이 무릎을 꿇었다. 세종시는 시내버스 전면 무료화를 공약했다가 해마다 250억원을 웃도는 재정 부담을 감당하지 못하고 2023년 백기를 들었다. 대신 월 2만원을 내는 정액권 이응패스를 도입하며 유료 체계로 돌아섰다. 서울시 역시 자체 정기권이던 기후동행카드를 종료하고 정부의 환급형 교통패스인 모두의카드로 통합 전환했다. 요금을 공짜로 푸는 방식 대신 일정 수준의 운임을 분담시키고 환급해 주는 방식으로 선회한 것이다. 무료 승차권을 쥐여주기는 쉽지만 그 표를 들고 탈 버스를 도로 위에 남겨두기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선 결과다.

버스 앞문에 놓인 승차 단말기는 단순한 결제 도구가 아니다. 승객이 카드를 대며 치르는 운임은 내일 아침에도 이 버스가 멈추지 않고 운행할 것임을 약속하는 가장 확실한 담보다. 단말기에서 가격을 0원으로 지운 도시는 버스의 바퀴를 멈춰 세웠다. 정류장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공짜 버스를 탈 승객은 없다. 대중교통이 도로 위 승용차를 밀어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빈틈없이 도착하는 배차 빈도와 정시성에서 나온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는 오는 15일 서울 시내버스 노사의 2차 노동쟁의 조정회의를 열고 통상임금 기준시간과 재정지원안을 놓고 최종 담판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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