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세상의 흐름

미국 국채 버리고 빅테크 담는 나라들...흔들리는 기축통화 질서

외국인의 미국 증권 보유액 중 주식 비중 56% 돌파...원금 보장보다 자본 수익률 택한 중앙은행과 국부펀드의 고육책

리지

미국 국채와 주식5분

Illustration by Gemini

미국 재무부 연례 대외자산 조사에 따르면 외국인의 미국 증권 보유 총액은 35조 3,490억달러다. 이 가운데 미국 주식이 19조 8,600억달러로 전체의 56.2%를 차지했다. 장기와 단기를 합친 채권 총액 15조 4,890억달러를 4조달러 넘게 웃도는 수치다. 비상시를 대비해 달러를 보관해온 금고에서 국채 대신 미국 기업 주식이 앞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글로벌 기축통화 질서를 떠받친 순환 구조는 단순했다. 신흥국과 산유국은 공산품과 원유를 미국에 내다 팔았다. 그렇게 벌어들인 달러로 미국 재무부가 발행한 국채를 매입했다. 미국은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와 재정적자를 외국 정부의 저금리 자금으로 충당했다. 그 대가로 외국 정부는 언제든 달러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무위험 자산을 얻었다.

이 거래의 원형은 1974년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맺은 합의였다. 사우디가 원유 결제 대금을 오직 달러로만 받고 미국 국채를 사주는 대가로 미국은 왕실 안보를 보장했다.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를 팔아 번 달러가 워싱턴의 국채 발행 창구로 되돌아왔다. 이 재순환 구조가 달러 패권의 기틀을 세웠다.

이 체제는 2000년대 중국의 외환보유액이 급증하면서 정점에 달했다. 중국 정부는 값싼 노동력으로 공산품을 수출해 달러를 쌓았다. 그 돈을 미국 국채에 투자하며 한때 보유액을 1조 3,000억달러 넘게 불렸다. 미국 국채는 어떤 경제 위기에서도 원금을 돌려받는 신뢰의 상징이었다. 각국 중앙은행은 이 증서를 외환보유액의 핵심 자산으로 삼았다.

하지만 2020년대 들어 이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국의 국가부채는 35조달러를 넘어섰다. 해마다 2조달러에 육박하는 재정적자가 만성화되면서 채권 시장의 손익 계산이 바뀌었다. 미국 의회가 부채한도를 두고 대립을 반복하는 동안 시장은 미국의 재정 건전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2022년 이후 미 연방준비제도가 단행한 급격한 금리 인상이었다. 치솟는 물가를 잡으려 기준금리를 올렸다. 만기가 10년, 30년 남은 장기 국채 가격이 고점 대비 40% 넘게 내렸다. 만기까지 기다리면 약속된 액면 달러는 돌려받는다. 하지만 치솟은 물가 앞에서 통화의 실질 구매력이 하락하는 현실을 각국 정부가 확인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서방의 금융 제재는 또 다른 충격을 안겼다.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 3,000억달러를 동결했다. 미국 국채가 워싱턴의 정치적 결단에 따라 하루아침에 묶일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재정적자가 누적된 발행자의 건전성은 물론 기축통화 자산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신뢰마저 동시에 약화됐다.

역설적이게도 미국의 민간 기업들이 채권의 빈자리를 파고들었다. 인플레이션으로 화폐 가치가 떨어질 때 글로벌 시장을 장악한 대형 기술기업들은 달랐다. 제품과 서비스 가격을 올려 현금흐름을 늘렸다. 나랏빚을 갚기 위해 통화를 팽창시키는 정부의 국채보다 기업 지분이 낫다는 계산이 섰다. 기술과 플랫폼을 쥐고 전 세계에서 이익을 내는 기업 지분이 구매력 방어에 더 효과적이었다.

보수적인 중앙은행조차 이 계산에 뛰어들었다. 스위스국립은행(SNB)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 제출한 공시가 단적인 예다. 올해 2분기 기준 보유한 미국 상장 주식 가치만 1,914억달러에 달했다. 웬만한 글로벌 헤지펀드를 넘어서는 규모로 엔비디아와 마이크로소프트, 애플의 주요 주주에 이름을 올렸다. 중앙은행이 자국 통화 방어용으로 사 모은 외환으로 실리콘밸리 기업의 주요 주주 자리에 오른 것이다.

노르웨이 국부펀드 역시 비슷한 궤적을 그린다. 1조 7,000억달러를 운용하는 이 거대 펀드는 전체 자산의 70% 이상을 주식으로 채웠다. 미국의 국채 대신 기업 지분을 사 모았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채권이 물가상승률을 방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미국의 부채 보유자에서 자본 소유자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물론 외환보유액이나 국가 공공자산으로 주식을 사 모으는 방식에는 뚜렷한 한계와 위험이 따른다. 외환보유액의 제1원칙은 비상시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안전성과 유동성이다. 금융위기가 터져 환율이 요동치고 달러가 부족해지는 순간 주식시장은 어김없이 급락한다. 자산 가치가 급락한 시점에 손실을 감수하고 주식을 내다 팔아야 한다면 외환시장 방어선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그럼에도 각국 정부가 주식 비중을 늘리는 까닭은 채권만 쥐고 있는 대가가 더 크기 때문이다. 미국의 재정적자는 구조화됐다. 10년 만기 미국 국채 금리가 4%대를 줘도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실질 수익률은 기대하기 어렵다. 명목 원금만 보장되는 채권에 갇혀 실질 구매력을 내어줄 수는 없다. 단기 변동성을 감수하고서라도 자본 수익률을 좇는 고육책을 택한 것이다.

외환위기의 기억을 안고 있는 한국은 이 갈림길에서 한층 더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인다. 한국은행의 8월 말 외환보유액은 4,422억 8,000만달러로 불어났다. 2022년 5월 이후 가장 많은 액수다. 하지만 한은은 25년 만에 국가별 순위 공개를 중단하며 양적 비교보다 내실 다변화에 무게를 뒀다.

한은은 자산 다변화를 위해 2분기 2억 5,000만달러 상당의 금 상장지수펀드를 매입했다. 이어 이르면 12월, 13년 만에 국내 생산 금 현물 1톤을 사들이기로 했다. 전체 외환보유액의 11%가량을 선진국 주식에 분산해 운용한다. 하지만 환율 방어의 최전선에 선 중앙은행이 주식 비중을 마냥 공격적으로 늘리기는 어렵다.

그 빈틈은 국민연금과 한국투자공사가 채웠다. 2,000억달러를 운용하는 한국투자공사는 주식 비중을 40% 안팎까지 유지하며 수익률을 끌어올렸다. 1,100조원이 넘는 국민연금 역시 해외주식 목표 비중을 30%대 중반으로 키웠다. 미국의 우량 기업 지분을 대거 사들였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거대한 해외 주식 매수는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흡수했다. 원화 가치를 떨어뜨리는 부담으로 돌아왔다. 달러 수요가 환율을 밀어 올리자 한국은행은 국민연금과 600억달러 한도의 외환스와프 협약을 맺었다. 한국은행이 직접 달러를 공급하고 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해외 우량 자본을 사들이는 투자가 당장의 환율 안정을 위협하는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미국의 채권 대신 주식을 사려는 국부의 전환이 국내 금융시장에는 또 다른 비용을 치르게 하고 있다.

이 거대한 자본 이동의 흐름을 가늠하려면 다음 분기부터 두 가지 지표를 주시해야 한다. 미국 재무부가 분기마다 갱신하는 외국 공공기관의 미국 국채 순매도 추이가 첫째다. 물가상승률을 뺀 미국 10년 만기 물가연동국채(TIPS)의 실질금리가 둘째다. 실질금리가 1%대로 내려앉거나 마이너스로 떨어질수록 각국 정부의 주식 쏠림은 한층 더 가속화될 공산이 크다.

위기 때마다 꺼내 쓸 비상금을 모아두던 국가의 외환보유액은 성격이 바뀌었다. 미국의 성장 과실을 나눠 갖는 투자 자산으로 탈바꿈했다. 세계는 미국의 나랏빚을 떠받치는 채권자 자리를 서서히 내려놓고 미국의 기업을 소유하는 주주가 되는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미국 재무부 조사에서 외국인의 미국 주식 보유 총액은 1년 만에 2조 9,820억달러 불어났다. 사상 처음으로 20조달러 선에 바짝 다가섰다.

이 글이 어땠나요?

눌러 주시면 다음 글을 쓸 때 소중한 참고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