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과학
엔비디아 3000억달러 금융 보증...고객사 빚으로 만든 반도체 호황
빅테크의 자체 칩 개발과 신생 클라우드 기업 보증...닷컴 버블 당시 시스코 대출 닮아
엔비디아가 기업가치 1조달러에 도달하기까지는 창사 이래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하지만 5조달러를 돌파하는 데는 불과 2년 남짓 걸렸다. 현재 시가총액은 5조달러를 훌쩍 넘어섰고 몇 년 뒤에는 연간 매출도 1조달러에 달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까지 나온다.
이 가파른 성장의 이면에는 반도체 제조 기술 외에 또 다른 장치가 작동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최근 자사 칩이 대거 투입될 오하이오 데이터센터에 최대 1050억달러 규모의 금융 보증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월가 대형 금융사들과 손잡고 5000억달러 규모의 인프라 투자를 추진하면서 고객사가 사들이는 장비 가치를 직접 보증한다는 계획도 밝혔다. 겉으로는 유망 사업이 제때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명분을 앞세웠다.
겉보기에는 일반적인 할부 금융과 닮았다. 하지만 엔비디아가 이 같은 금융 보증으로 안전망을 자처하고 나선 배경에는 주요 고객사의 이탈이라는 뼈아픈 고민이 깔려 있다. 엔비디아 매출의 절반을 차지하던 빅테크 기업들이 엔비디아 칩 가격의 3분의 1 수준인 자체 인공지능 반도체를 앞다퉈 설계하기 시작했다. 시장에서 자체 칩 비중이 빠르게 늘어나는 가운데 반도체를 대규모로 사줄 새로운 대체 수요처를 찾는 일은 발등의 불이 됐다.
엔비디아는 연산 능력을 임대해 주는 신생 클라우드 기업들에 눈을 돌렸다. 알파벳 같은 거대 기술기업은 50년 만기 채권을 5.7% 금리로 손쉽게 발행하지만 신용도가 낮은 신생 클라우드 기업 코어위브는 두 배에 이르는 비싼 이자를 물어야 한다. 이 금리 격차를 메우기 위해 엔비디아는 일정 기간 연산 용량을 약정 가격에 다시 사주는 최저 수익 보증 카드를 꺼내 들었다. 코어위브 지분 11%를 사들이고 대규모 미사용 용량을 구매하기로 합의하는 등 고객사에 약속한 금융 지원과 보증 규모만 3000억달러에 이른다.
이 같은 금융 계약은 고객의 자연스러운 수요를 뒷받침하는 수준을 넘어 엔비디아가 스스로 수요를 만들어내는 위험한 영역에 닿아 있다. 과거 닷컴 버블 당시 통신 장비 시장의 선두 주자였던 시스코와 루슨트 테크놀로지가 걸었던 길과 놀라울 정도로 겹친다.
당시 통신 장비 제조사들은 네트워크 장비를 팔기 위해 신생 통신사에 수십억달러의 대출과 구매 보증을 지원했지만 통신 수요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빚으로 버티던 고객사들은 줄줄이 무너졌다. 장비를 팔아 회계에 미리 올렸던 천문학적인 매출은 고스란히 떼인 돈이 되어 부실 채권 폭탄으로 돌아왔다.
현재 엔비디아의 호실적을 지탱하는 버팀목은 칩을 외상과 보증으로 사들인 고객사가 데이터센터에서 실제로 수익을 낼 수 있느냐는 전제 하나다. 문제는 이 전제가 흔들릴 때다. 인공지능 서비스의 수익성이 기대에 못 미치거나 대체 칩이 확산해 반도체 가격이 떨어지면 엔비디아는 판매 부진과 더불어 고객사에 제공한 수천억달러의 금융 보증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판매를 늘리기 위해 제공한 금융 안전망이 실적을 집어삼키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 시스코의 주가는 2000년 봄 정점을 찍은 뒤 불과 2년 반 만에 89%나 폭락하며 거품 붕괴의 상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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