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과학
보조금 쏟았는데 살 곳이 없다...안방서 장비 한 대도 못 판 ASML
상반기 유럽 매출 비중 0%...성숙 공정 늘며 최신 장비 외면

네덜란드 기업 ASML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생산하는 반도체 장비 업체다. 첨단 인공지능 칩 생산에 필수적인 장비를 독점 공급하며 시가총액 6,600억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올해 상반기 실적 보고서에서 유럽 매출 비중은 0%였고, 올해 들어 안방인 유럽 대륙에서 노광장비를 단 한 대도 팔지 못했다.
유럽 매출 감소는 수년 전부터 이어진 흐름이다. 전체 매출에서 유럽 비중은 2024년 5%에서 지난해 1%로 줄어든 데 이어 올해 상반기에는 0%로 떨어졌다. ASML 측은 최근 열린 토론회에서 "유럽에서는 아예 아무것도 팔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유럽 기업들이 반도체 설비 투자를 늘리지 않으면서 고가 장비를 사들일 고객이 사라졌다는 설명이다.
유럽연합은 2023년 유럽 반도체법을 마련하고 대규모 보조금 지급 계획을 발표했다. 정부 지원을 통해 2030년까지 세계 반도체 생산 점유율을 20%로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보조금 정책은 제조 시설 착공으로 곧바로 이어지지 못했다. 인텔이 추진하던 독일 마그데부르크의 300억유로 규모 공장 건설은 무산됐다. 유럽연합의 재정 집행을 감시하는 유럽 회계감사원도 지난해 평가에서 2030년 목표 달성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유럽에서 착공에 들어간 반도체 공장들도 최신 장비와는 거리가 멀다. 대만 TSMC가 주도해 독일 드레스덴에 짓는 150억유로 합작 공장은 12나노미터급 이상의 성숙 공정 반도체를 만든다. 독일 반도체 기업 인피니온이 완공한 50억유로 공장도 마찬가지다. 차량과 산업 기기에 들어갈 전력 반도체 생산에 집중한다. 이들 생산 시설은 이전 세대 장비로도 가동할 수 있다. 수천억 원에 달하는 극자외선 노광장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첨단 반도체의 실수요는 이미 아시아와 미국에 집중돼 있다. 올해 2분기 ASML 장비 수주액 가운데 한국, 대만, 일본 세 나라가 차지한 비중은 77%에 달했고 중국이 14%를 차지했다. 유럽에는 초미세 공정 반도체를 대량으로 사들여 서버를 채울 대형 정보기술(IT) 기업이 부족하다. 유럽에서 가공한 반도체 웨이퍼조차 후속 패키징 공정을 거치기 위해 아시아로 이송되는 탓에 유럽 대륙 안에서 자체적인 첨단 반도체 수요는 자연히 형성되기 어렵다.
공장 유치 보조금에 의존하는 공급 정책은 반도체 산업 자립을 보장하지 못했다. ASML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 설비 보조금 지급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건의했다. 유럽산 반도체의 수요를 모으고 보증하는 체계를 함께 마련해 달라는 요구였다. 하지만 올해 상반기 세계 반도체 기업들이 ASML에 주문한 극자외선 노광장비는 전량 아시아와 미국의 생산 공장으로 향했을 뿐, 유럽 공장에 공급된 장비는 단 한 대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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