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기술과 과학

박물관으로 들어간 흑백 단말기...월가는 왜 4000만원을 내나

PC와 인터넷의 보급으로 사라진 기계...몸에 밴 조작 방식이 굳힌 40년 독점

리지

블룸버그 터미널2분

Illustration by Gemini

블룸버그의 전용 단말기는 2000년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그해 독자 기기 대여 사업을 접고 일반 개인용 컴퓨터에서 작동하는 소프트웨어로 전환했다. 하지만 26년이 흐른 지금도 월스트리트에서 금융상품을 사고파는 트레이더들은 1980년대부터 쓰던 흑백 텍스트 화면과 원색의 전용 키보드를 버리지 못했다.

이 단말기의 대당 연간 구독료는 3만 2,000달러(약 4,000만원)를 웃돈다. 전 세계 30만 명이 넘는 금융업 종사자가 매년 이 투박한 화면을 책상 위에 띄우려 그 거액을 치른다. 블룸버그 터미널은 전 세계 금융 시장 참가자들이 복잡한 채권 가격과 시장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할 수 있도록 개발된 전용 정보 단말기 시스템이다.

1981년 살로몬브라더스에서 해고된 마이클 블룸버그가 퇴직 지분 1,000만 달러를 쥐고 회사를 차렸을 때만 해도 월가는 종이 시세표와 전화기로 일했다. 당시 투자자들은 주가와 금리를 전화기로 확인했고 채권 가치는 손으로 직접 계산하거나 직관에 의존했다. 로이터와 다우존스가 활자 뉴스를 보냈지만 흩어진 숫자를 모아 분석하는 일은 여전히 트레이더가 도맡아야 했다. 시장은 계산 장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블룸버그가 내놓은 첫 단말기 "마켓 마스터"는 흑백 음극선관 모니터와 자체 통신망 제어기로 이뤄진 단순한 계산 장치였다. 이듬해 메릴린치가 거액을 투자하며 초기 물량을 사들였다.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금리 통제를 풀어 시장 변동성이 커지자, 출렁이는 채권 가격과 복잡한 수익률 곡선을 실시간으로 계산해야 했던 월가는 즉각 반응했다. 시나리오 분석 결과를 키보드 조작 몇 번으로 화면에 띄워 주는 기계는 단숨에 트레이딩 룸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블룸버그가 구축한 폐쇄형 사설망은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전 금융 시장의 독점 인프라가 됐다. 블룸버그는 이 독점 인프라에 맞춰 국채, 회사채, 외환 등 전용 기능키를 색깔별로 배치한 키보드를 직접 조립해 금융사에 공급했다. 메뉴를 일일이 찾을 필요 없이 단축키 몇 개를 두드리면 방대한 통계와 분석 그래프가 즉시 표로 펼쳐졌다.

그 뒤 키보드에 트랙볼과 내장 스피커, 가입자끼리 직접 소통하는 전용 메신저 기능을 차례로 더했다. 트레이더들에게 이 자판을 능숙하게 치는 일은 금융권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관문이 됐다. 손끝의 감각이 거래 속도를 갈랐다.

인터넷이 보급되고 웹 브라우저가 화려한 그래픽을 쏟아내자 블룸버그의 전용 하드웨어는 설 자리를 잃었다. 블룸버그는 일반 컴퓨터용 프로그램을 내놓고 전용 단말기 임대 사업을 공식 중단했다. 모니터와 본체는 범용 컴퓨터로 대체됐지만 사용자가 마주하는 화면은 여전히 여백 없는 텍스트와 빽빽한 표였다. 트레이더들은 윈도 창을 마우스로 클릭하는 대신 전용 키보드의 노란색과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 조작 방식을 바꾸는 순간 초 단위로 오가는 거래 속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오늘날 블룸버그 단말기는 내부적으로 오픈소스 브라우저 엔진을 고쳐 쓰며 방대한 코드로 작동한다. 그럼에도 겉모습은 초기 단말기 시절의 텍스트 터미널 규격을 그대로 유지한다. 하드웨어가 사라지고 데이터 통신망이 모두에게 개방된 시대에도 금융사 책상에서 한 번 손에 익은 조작 체계는 어떤 경쟁자도 뚫지 못하는 진입장벽이 됐다.

본사 박물관에는 초기에 제작된 단말기가 지금도 실시간 시장 뉴스를 출력하며 작동하고 있다. 낡은 화면을 지탱한 힘은 오랜 세월 손에 밴 습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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