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쿠바 위기 12시간이 낳은 직통선, 그 일과는 매시간 체호프 옮겨 적기
말은 오해를 낳을 수 있어 글자만 오가기로 해...곰돌이 푸는 시험 전문에서 제외
1963년 8월 30일 워싱턴에서 전신 타자기인 텔레타이프가 종이 위에 한 줄을 찍어냈다. 타자기를 점검할 때 쓰는 영문 표본 문장이었다. "THE QUICK BROWN FOX JUMPED OVER THE LAZY DOG'S BACK 1234567890." 빠른 갈색 여우가 게으른 개를 뛰어넘는다는 문구 뒤에 숫자를 덧붙인, 알파벳 26자가 한 번씩 다 들어가는 문장이다. 대문자 전용 장비라 모든 글자가 대문자로 전송됐다. 미국과 소련을 잇는 직통선의 첫 전문에는 별다른 뜻이 담기지 않았고, 활자가 빠짐없이 찍히는지 살피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핫라인은 미국과 소련 지도부가 비상시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서로 연락을 주고받도록 1963년에 두 나라가 합의해 개통한 상설 통신선이다. 정상 간 통화용 전화기 대신 두 나라 수도를 잇고 문자만 오가는 회선을 깔았다.
이 선은 열 달 전 겪은 외교적 실패에서 비롯됐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정식 외교 전문을 주고받는 데 6시간이 소요됐고, 흐루쇼프가 보낸 3,000단어 타협안은 미국이 접수해 해독하는 데만 12시간 가까이 걸렸다. 워싱턴이 답신을 작성하는 사이 모스크바에서는 튀르키예에서 미사일을 철수하라는 더 강경한 전문이 도착했다. 답할 상대가 그사이 입장을 바꿔 다른 말을 꺼내고 있었다.
1963년 6월 제네바에서 양국 대표가 합의 각서에 서명했다. 전화선 대신 텔레타이프 회선 2개를 깔았는데, 말은 오해를 낳을 수 있어 글자만 주고받기로 하고 정상은 각자 모국어로 쓰되 번역은 받는 쪽이 맡았다. 7월에 미국은 자판으로 친 글자가 상대편 종이에 찍히는 단말기인 로마자 텔레프린터 4대를 모스크바로 보냈고, 소련은 한 달 뒤 키릴 자판을 단 동독제 텔레프린터를 워싱턴으로 보냈다. 회선은 런던과 코펜하겐, 스톡홀름, 헬싱키를 거쳤다.
개통 직후 이 선이 맡은 일은 위기 대응 대신 상시 점검이었다. 짝수 시에는 미국이, 홀수 시에는 소련이 시험 전문을 보냈다. 미국 담당자들은 셰익스피어와 마크 트웨인, 백과사전, 구급 요령을 옮겨 적었고 소련 쪽은 체호프를 보냈다. 곰돌이 푸는 제외했는데, 곰이 러시아의 상징이라 문장이 오해를 부를 수 있었다.
점검할 이유는 분명했다. 회선은 여러 차례 끊어졌고, 코펜하겐 인근에서는 불도저 기사가, 핀란드에서는 밭 갈던 농부가 케이블을 끊었다. 핀란드 포르사에는 지금도 "우편전신부"라고 적힌 표지판이 케이블 자리를 가리키며 서 있다. 선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위기가 닥친 날 알면 늦으니, 평온한 오후에 미리 알아야 했다.
선은 오래 살아남았다. 1984년에 팩스가 도입됐고, 2008년부터는 전용 컴퓨터망이 그 자리를 물려받아 지금은 채팅으로 운영 일정을 맞추고 이메일로 전문을 보낸다. 2015년 시리아와 2022년 우크라이나에서 미국과 러시아가 긴급하게 개설한 통로도 같은 종류의 선이다. 급할 때 그 선이 살아 있을지는 아무 일 없는 날 무엇을 보냈는지가 결정한다. 63년 전 오늘 모스크바로 건너간 여우 한 마리도 그 일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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