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오대호 잇는 584km 물길, 뉴욕을 무역 중심지로 키웠다
버펄로에서 뉴욕시까지 밀 1톤 운송비, 1815년 약 100달러에서 1825년 약 10달러로 감소

201년 전 오늘, 1825년 10월 26일 미국 뉴욕주 버펄로에서 세네카 치프(Seneca Chief)호가 이리 운하에 진입했다. 운하와 허드슨강을 따라 배치한 대포를 차례로 쏘아 개통 소식을 전했다. 버펄로에서 보낸 첫 신호가 뉴욕시에 전달되기까지 90분이 걸렸다.
이리호와 허드슨강을 연결하는 363마일(약 584킬로미터)의 물길이 전 구간 개통한 날이었다. 디위트 클린턴 뉴욕 주지사가 탄 세네카 치프호는 운하를 지나 올버니에 도착한 뒤 허드슨강을 따라 내려갔다. 11월 4일 클린턴은 뉴욕항 앞바다에서 이리호의 물을 대서양에 부었다. 오대호와 해안 사이에 이어진 운송 경로를 배의 이동으로 보여준 행사였다.
운하가 개통되기 전에는 내륙에서 곡물을 많이 생산해도 멀리 떨어진 해안 시장에 내다 팔기 어려웠다.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고 열악한 도로를 지나는 데 드는 운송비 때문에 곡물을 팔아 얻는 수익이 줄었다. 농산물 유통업자 제시 하울리는 운송 사업에서 파산해 채무자 감옥에 갇혔고 수감 중이던 1807~1808년 신문에 운하 건설을 주장하는 글을 기고했다. 운송비가 적게 드는 경로를 확보해야 내륙 생산물의 판매 시장도 넓힐 수 있었다.
하지만 긴 인공 수로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자금과 기술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았다.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1809년 제시된 운하 구상을 시기상조로 여겼다. 반대파는 사업을 추진한 클린턴의 이름을 붙여 "클린턴의 바보짓"과 "클린턴의 큰 도랑"이라고 조롱했다. 뉴욕주는 연방 정부의 지원 없이 주정부 재원과 차입금 등으로 공사를 추진했고 1817년 착공해 8년 만에 운하를 완성했다.
뉴욕에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남쪽의 캐츠킬산맥과 북쪽의 애디론댁산맥 사이로 모호크 계곡이 동서로 이어졌고 계곡의 모호크강은 허드슨강과 합류했다. 이 자연 통로를 이용하면 오대호와 대서양을 잇는 수운 경로를 만들 수 있었다. 이리 운하는 서쪽 버펄로에서 동쪽 올버니까지 이어졌으며 동쪽 구간은 모호크 계곡을 지나 허드슨강과 연결됐다. 올버니 하류에서는 허드슨강을 따라 뉴욕항까지 갈 수 있었다.
계곡을 이용하더라도 고도 차를 극복하고 강을 건너야 했다. 허드슨강에서 이리호까지 약 173미터의 높이 차를 극복하기 위해 83개의 갑문을 설치했고 강과 골짜기를 가로지르는 곳에는 수로교를 세웠다. 배는 갑문 안의 수위가 높아지거나 낮아짐에 따라 높이가 다른 수로 사이를 이동했다. 이렇게 폭 40피트(약 12미터), 깊이 4피트(약 1.2미터)의 수로를 연결했다.
측량을 맡은 제임스 게디스와 벤저민 라이트는 판사이자 측량사였다. 기술자들은 공사를 진행하면서 갑문과 수로교 건설 기술을 익혔다. 캔버스 화이트는 현지 석회암으로 실험해 물속에서도 굳는 수경성 시멘트를 개발했다. 이 시멘트는 기존 석회 모르타르로 만든 구조물이 파손돼 보수나 재건이 필요했던 현장에 사용됐다. 높이가 다른 수로를 잇고 강을 건너는 구조물을 완성해야 운하 전 구간을 이용할 수 있었다.
운하가 개통되자 화물 운송 방식이 달라졌다. 말이나 노새가 운하 제방의 예인로를 걸으며 화물을 실은 배를 끌었다. 물에 뜬 배로는 육상 차량보다 적은 힘으로 많은 짐을 운송할 수 있었다. 버펄로에서 뉴욕시까지 밀 1톤을 보내는 운송비는 1815년 약 100달러에서 1825년 약 10달러로 낮아졌다. 이 구간의 밀 운송비가 약 90퍼센트 줄었다.
운송비가 낮아지면 내륙 생산자는 멀리 있는 시장에도 곡물을 팔 수 있고, 해안에서 들여오는 상품도 더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운하는 서쪽의 곡물과 목재를 동쪽으로 보내는 동시에 동쪽의 상품과 공산품을 내륙에 공급했다. 오대호에서 버펄로로 모인 화물은 운하와 허드슨강을 거쳐 뉴욕항에 닿았다. 뉴욕항은 내륙 생산물의 판매와 해외 교역을 연결하는 주요 관문으로 성장했다.
경쟁 항구들도 내륙과 연결되는 노선을 확보하려 했다. 펜실베이니아주는 필라델피아와 피츠버그를 연결하는 메인라인을 건설하면서 운하와 철도를 연결했다. 산악 구간을 넘으려면 중간에 화물을 배에서 육상 운송 수단으로 옮겨야 했다. 이런 환적에 드는 비용은 이리 운하와 경쟁하는 데 부담이 됐다. 모호크 계곡과 허드슨강을 이용한 뉴욕의 운송 경로는 내륙과 항구 사이를 수운으로 연결한다는 이점이 있었다.
교역 확대는 통행료 수입에도 나타났다. 이리 운하의 통행료 수입은 전 구간 개통 다음 해인 1826년 약 67만7000달러에서 1835년 약 137만6000달러로 늘었다. 뉴욕주는 통행료와 운하 기금에 배정한 세금 등을 통해 이리·챔플레인 운하의 초기 건설 채무를 갚을 재원을 1836년까지 확보했고, 마지막 채무는 1845년에 상환했다. 운송비를 낮춘 물길은 이용자에게 시장을 넓혀주는 동시에 주정부에는 건설비를 회수할 수입을 제공했다.
이후 철도가 더 빠르고 겨울에도 운행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운하와 경쟁했다. 1853년에는 올버니와 버펄로 사이의 여러 철도회사가 합쳐져 뉴욕센트럴철도가 됐다. 운하를 따라 연결된 도시들 사이에 철도망이 확장됐고, 운하의 낮은 운임은 철도 화물 운임을 견제하는 역할도 했다. 뉴욕의 내륙 교역은 운하와 철도가 함께 경쟁하는 단계로 넘어갔다.
오늘날 여러 차례 확장과 노선 변경을 거친 이리 운하는 관광과 휴양에 주로 이용된다. 화물 운송에서 운하가 차지하는 비중은 줄었지만 버펄로와 로체스터, 시러큐스 등 물길을 따라 성장한 도시들은 남았다. 현재도 뉴욕주 북부 인구의 약 80퍼센트가 이리 운하에서 약 40킬로미터 이내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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