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예금 10% 떼인다"...노던록 지점 앞 메운 150년 만의 줄서기
2,000파운드 초과 예금에 10% 손실 지우는 영국 규정...손실 분담 제도가 150년 만의 뱅크런 방아쇠 당겨
2007년 9월 14일 아침, 영국 전역의 주택담보대출 전문은행 노던록 지점 앞에는 수천 명의 예금자가 새벽부터 줄을 늘어섰다. 전날 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이 노던록에 긴급 유동성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였다. 한 세기 반 만에 영국 땅에서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가 터졌다.
고객들이 통장을 손에 쥐고 지점 앞 보도블록으로 뛰어나온 배경은 따로 있었다. 예금자들은 첫 2,000파운드만 전액 돌려받고 그 이상은 10%의 손실을 직접 떠안아야 한다는 정부의 예금자보호 규정에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예금자보호 제도는 금융회사가 파산했을 때 정부나 공공기관이 원리금을 대신 지급하는 안전판이다. 당시 영국 금융서비스보상체계(FSCS)의 규정은 이례적이었다. 계좌 잔액 가운데 2,000파운드까지만 전액을 보장하고 다음 구간은 90%만 보장해, 계좌마다 수천 파운드의 손실 위험을 남겨 두도록 설계한 제도였다. 소비자에게 손실을 분담시키는 이른바 공동보험(co-insurance) 방식이었다.
예금을 전액 보장하면 예금자가 은행 경영 감시를 소홀히 하는 도덕적 해이에 빠진다는 금융 이론을 그대로 옮겨 놓은 장치였다. 정부는 예금자도 위험을 분담하도록 해 시장의 자기 규율을 확립하려 했다.
하지만 위기 국면에서 예금자들은 손실 분담 규정 앞에서 정반대로 움직였다. 은행이 파산하면 수천 파운드를 고스란히 잃을 처지였다.
가만히 앉아 예금의 10%를 잃기보다 남보다 먼저 지점에 도착해 창구에서 돈을 찾는 편이 예금자 개인에게는 자산을 지키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은행을 감시하라고 만들어 둔 안전장치의 허점이 예금자 전원을 지점 창구로 몰려들게 만든 방아쇠가 됐다.
공포는 빠르게 확산했다. 이날 하루에만 노던록 예금 10억파운드가 빠져나갔고, 인터넷 뱅킹 사이트는 접속 폭주로 마비됐다. 주말을 지나며 인출 규모는 20억파운드를 돌파했다.
당시 노던록의 주택담보대출 연체율은 업계 평균의 절반 수준으로 자산 건전성이 탄탄했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여파로 단기 금융시장이 얼어붙자 만기가 돌아온 차입금을 막지 못해 유동성 경색에 빠진 탓이었다. 하지만 원금을 잃을 수 있다는 불안 앞에서는 재무 건전성도 예금자를 붙잡아 두지 못했다.
뱅크런이 다른 대형 은행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자 영국 정부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사흘 뒤 앨리스터 달링 재무장관은 긴급 성명을 내고 노던록의 모든 예금을 정부가 전액 보장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부의 전액 보장 발표가 나오자 지점 앞 행렬은 빠르게 잦아들었다.
도덕적 해이를 막겠다며 남겨 둔 손실 분담 규정 탓에 한 세기 반 만의 뱅크런이 일어났고, 사태를 수습하려 정부가 예금 전액을 세금으로 떠안는 역설을 낳았다.
영국 금융당국은 그해 10월 예금자의 손실 분담 규정을 전격 폐지했다. 일정 한도 안에서는 예금을 전액 돌려주는 방식으로 안전망을 전면 개편했다. 불완전한 보장이 오히려 뱅크런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각국은 이후 예금자보호 한도를 일제히 확대했다. 영국 정부는 2008년 2월 노던록을 국유화하고, 부실 자산과 정상 은행을 분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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