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소화기 얹어 팔던 300㎏ 복사기...제록스 914, 장당 4센트로 2억달러 벌어
2만7,500달러 기계 안 팔리자 월 95달러 임대 도입...장당 4센트 종량제로 1965년 매출 2억달러 달성

1959년 9월 16일 뉴욕 셰리-네덜란드 호텔에서 열린 텔레비전 생중계 시연회에 일반 종이 복사기 제록스 914가 등장했다. 시연 도중 복사기 두 대 가운데 한 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며 불이 붙었다. 복사기 내부의 고열 정착 장치 탓에 종이가 타들어 가기 일쑤였다. 기계 과열로 화재가 잦자 회사는 소화기를 "그을음 제거기"라는 점잖은 명칭의 부품으로 함께 공급했다.
복사기는 빛과 정전기를 이용해 원본 서류를 종이에 복제하는 사무용 기계다. 소화기를 갖추고 나온 복사기는 크기 또한 거대했다. 기계 무게만 300킬로그램에 달해 책상 하나를 통째로 차지했다. 내부 구조가 복잡해 미국 정부가 산정한 판매 가격은 2만7500달러에 이르렀다. 컨설팅 회사 아서 D. 리틀은 시장 조사 보고서에서 미국 전체를 통틀어 이 고가 장비를 구매할 곳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주요 대기업 역시 판권 인수를 거부했다.
제품이 팔리지 않자 사진 인화지 제조사 할로이드 제록스는 전략을 바꿨다. 회사는 기계를 판매하는 대신 고객 사무실에 임대하기로 했다. 월 95달러에 기본 물량을 제공하고 초과분에 장당 4센트를 청구하는 임대 방식을 도입했다. 복사기 내부에는 이용 횟수를 계측하는 장치를 설치했다. 고객은 매달 계측기에 기록된 사용량을 적은 엽서를 제록스 본사로 보냈다.
장당 4센트라는 비용은 사내 결재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 소액이었다. 먹지와 등사기로 손에 잉크를 묻히던 직원들은 버튼 하나로 서류를 출력하는 편리함에 호응했다. 이용량이 적을 것이라는 관측과 달리 기계 한 대가 매달 수만 장을 찍어냈다. 복사 비용이 하락하자 사무실 내 종이 문서 생산량은 오히려 급증했다.
기계를 사실상 무상으로 제공하고 이용 횟수로 수익을 올린 제록스의 현금흐름은 빠르게 개선됐다. 수년 뒤 제록스는 이 복사기 단일 모델로 2억43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한 제품이 회사 전체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이다. 복사기의 성공에 힘입어 회사는 사명을 제록스 코퍼레이션으로 변경했다.
이 기계는 사무실의 서류 복제를 넘어 정보 유통 구조까지 변화시켰다. 군사 분석관 대니얼 엘스버그는 미국 국방부 기밀문건인 펜타곤 페이퍼를 외부에 공개하기 위해 밤새 제록스 복사기를 가동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서류가 복제되는 기계 앞에서 기밀과 저작권의 경계는 빠르게 허물어졌다.
제록스 914의 성공으로 단순 하드웨어 판매보다 사용량에 비례해 요금을 받는 종량제 방식의 효과가 입증됐다. 기계를 낮춘 가격으로 보급하고 소모품과 이용 횟수로 수익을 회수하는 구조는 현대 플랫폼과 클라우드 서비스의 기본 모델이 됐다. 제록스는 십수 년간 이 복사기를 생산했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은 초기 생산라인에서 제조된 복사기 한 대를 영구 소장품으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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