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백과사전

구형 지구의 가장 빠른 지름길...북극 항로 가로막은 얼어붙는 연료와 국경선

1954년 첫 극지 횡단 이후 70년...비행기 항속거리 늘어도 땅 위 국경선 따라 열리고 닫혀

리지

북극 항공로2분

Illustration by Gemini

1954년 늦가을 미국 로스앤젤레스 공항 활주로에서 영화배우 시드 챠리스가 샴페인 병을 들었다. 프로펠러 4개를 단 스칸디나비아항공의 여객기 앞머리에는 바이킹 탐험가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비행기는 대서양 건너편 대신 북쪽 하늘 끝으로 향했다.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그린란드를 거쳐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향한 이 비행은 인류가 정기 여객기를 타고 북극 하늘을 가로지른 첫 순간이었다. 미국 연방항공국이 북위 78도선 너머 극지로 규정하는 비행 통로인 북극 항공로(polar route)는 그렇게 상업 비행의 역사에 첫발을 디뎠다.

북극 항공로는 유럽과 북미, 동아시아처럼 북반구에 흩어진 도시들을 북극권 상공을 가로질러 잇는 하늘길이다. 스칸디나비아항공이 1954년 로스앤젤레스와 코펜하겐을 오가는 정기 노선으로 이 길을 처음 열었는데, 둥근 지구를 그대로 줄여 놓은 모형인 지구본 위에서 두 도시를 잇는 가장 짧은 선이 대서양 대신 극지를 지나기 때문이었다.

둥근 지구본 위에서 두 도시를 잇는 가장 짧은 선은 적도와 나란한 직선 대신 극지를 지나는 대원항로다. 평면 지도에 익숙한 눈에는 북쪽으로 크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비행시간을 대여섯 시간 줄여 주는 지름길이다. 이 하늘길을 여는 데는 엔진 말고도 넘어야 할 것이 있었다. 극지의 성층권에서 여객기를 가로막은 첫 복병은 혹한에 얼어붙는 항공유였다. 항공유는 영하 40도 안팎에서 얼기 시작하는데, 장시간 극지를 날다 보면 날개 속 거대한 연료 탱크 온도가 어는점에 가까워진다. 조종석의 경보 장치가 어는점보다 3도 높은 온도에서 울리도록 설계된 이유다. 경보가 울리면 조종사는 상대적으로 공기가 따뜻한 고도를 찾아 기수를 돌려야 했다.

1954년 11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첫 북극 항공로 여객기의 취항을 기념하는 배우 시드 챠리스. 위키피디아

얼어붙는 연료보다 땅 위의 냉전이 하늘을 더 완강하게 가로막았다. 냉전 시기 소련과 중국은 서방 민항기에 영공을 굳게 닫았다. 유럽과 동아시아를 오가는 비행기들은 북극점을 직선으로 넘지 못하고 알래스카 해안과 그린란드를 잇는 우회로를 돌아야 했다. 이 지정학적 단절은 알래스카 앵커리지 공항에 기묘한 풍경을 낳았다. 에어프랑스와 일본항공, 영국항공과 루프트한자의 점보기가 중간 급유를 위해 줄지어 내리면서, 인구 수만의 북쪽 변방 도시는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항공 교차로가 됐다. 하늘의 가장 빠른 직선을 두고도 승객들은 알래스카의 면세점에서 몇 시간씩 대기해야 했다.

냉전이 해체되면서 하늘의 장벽도 무너졌다. 러시아 정부와 미국 항공 당국이 실무 협의를 거쳐 시베리아 상공을 관통하는 북극 항로를 공식 개방했다. 뉴욕을 출발한 홍콩행 여객기가 중간 기착 없이 극지를 가로질렀다. 북극점과 러시아 영공을 통과해 반나절 남짓 만에 대륙을 잇는 진정한 극지 횡단 비행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비행기의 항속거리가 늘어나고 항법 장치가 정교해지면서 북극 상공은 마침내 가장 경제적이고 자연스러운 직선 주로가 되는 듯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영공 봉쇄가 재현되자 북극의 지름길은 다시 닫혔다. 런던에서 도쿄로 향하는 민항기들은 다시 스코틀랜드와 그린란드, 알래스카를 돌아 네 시간을 더 날아야 하는 냉전 시절의 항로로 밀려났다. 반세기 전 로스앤젤레스 활주로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며 꿈꿨던 최단거리 비행은 기술 부족보다 지상의 갈등 때문에 멈춰 서기를 반복한다. 구형의 지구가 내어준 가장 완벽한 기하학적 직선도, 결국 땅 위의 국경이 문을 열어줄 때만 비로소 하늘길이 된다.

이 글이 어땠나요?

눌러 주시면 다음 글을 쓸 때 소중한 참고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