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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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의 세 수도, 1,300㎞ 하늘길에 띄운 권력의 심장

수도 명시 없이 세 도시로 기능 분산...1910년 식민 갈등 봉합한 타협의 연장

리지

남아프리카 공화국3분

Illustration by Gemini

해마다 정기 국회가 열릴 때가 다가오면 남아프리카 공화국 행정부는 짐을 꾸린다. 행정부의 대통령과 각료들, 수백 명의 관료가 공항으로 향한다. 이 관료들이 프리토리아 청사에서 1,300킬로미터 떨어진 케이프타운으로 이동하며 행렬을 이룬다. 관료들은 두 도시에 관저와 집무실을 이중으로 두고 비행기로 오간다. 이런 기이한 순례가 벌어지는 까닭은 헌법에 수도를 정한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헌법 제4장에는 "의회 소재지는 케이프타운"이라는 한 줄만 적혀 있다. 이에 따라 행정부는 프리토리아에 머물고 의회는 케이프타운에서 열린다. 한편 사법부를 대표하는 기관인 최고항소법원은 중부 블룸폰테인에 따로 떨어져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기형적 통치 구조다. 실제로 남아공은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 122만㎢ 영토에 5,919만 명이 살아가는 국가다. 이 나라는 12개 공용어를 지정할 만큼 여러 민족이 모여 산다. 하지만 통치의 심장부를 셋으로 나눈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이러한 삼원 수도는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이 출범할 때 틀을 잡았다. 당시는 격렬했던 보어 전쟁을 막 치른 뒤였다. 전쟁을 치른 영국계 케이프와 나탈, 네덜란드계 이주민 후손인 보어인들의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은 통합 정부를 꾸리면서도 상대 도시를 단독 수도로 인정하지 않았다.

주권 기능을 떼어내 셋으로 나누는 타협으로 갈등을 풀었다. 이 타협에서 광업 중심지였던 트란스발은 행정을 맡아 프리토리아에 정부 청사를 두었다.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케이프는 입법을 맡았다. 입법을 맡은 케이프는 케이프타운에 의사당을 세웠다. 사법 기능이라도 쥐어야 했던 오렌지 자유국은 블룸폰테인에 최고항소법원을 들였다. 이때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 나탈에는 철도 혜택과 함께 금전적 보상금을 지급했다. 이처럼 분열을 막기 위해 통치 기구를 나눴지만 곧바로 막대한 유지 비용이 뒤따랐다. 유지 비용 가운데 관료들이 나라를 종단하며 쓰는 이동 경비와 중복 행정으로 국고 낭비가 이어졌다.

케이프타운 컴퍼니스 가든에 자리한 남아프리카 공화국 의회 의사당. 사진 조너선 비치, CC BY-SA 4.0
행정 낭비를 줄이려는 통합 시도는 일찍부터 이어졌다. 의회를 프리토리아로 옮겨 입법과 행정을 합치자는 통합 주장은 100년 넘게 반복됐다. 이러한 통합 논의가 오를 때마다 비용 절감 보고서가 책상 위에 놓였다. 의사당을 옮기면 해마다 관료 출장비와 청사 유지비를 크게 아낄 수 있다는 보고서가 잇따랐다. 하지만 통합 법안은 번번이 의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의회를 이전하면 케이프타운 경제가 흔들리고, 북부 내륙으로 권력이 쏠린다는 반발이 거셌다. 결국 1910년의 타협을 건드리면 지역 간 평화가 깨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경제 논리를 눌렀다.

1994년 백인 정권의 인종 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무너지고 새 시대가 열렸을 때도 이 묵은 규칙은 흔들리지 않았다. 새 정부가 차별 제도를 폐지하고 민주 헌법을 세웠지만 세 수도 체제는 그대로 유지했다. 오히려 통치 기구의 분산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최고 사법기관인 헌법재판소는 블룸폰테인을 건너뛰고 최대 도시 요하네스버그에 둥지를 틀었다. 이에 따라 헌법 재판과 일반 항소 재판을 다루는 최고 법원이 서로 다른 도시에 나뉘어 자리 잡았다. 이는 갈등을 피하기 위해 권력을 잘게 나누는 남아공 특유의 타협 방식이 다시 작용한 결과다.

남아공의 지니계수는 0.67로 세계에서 소득 불평등이 가장 심한 나라에 속한다. 실제로 실업률은 30%를 웃돌고 사회적 갈등은 여전히 깊다. 이처럼 내부 균열이 깊은 사회일수록 특정 집단의 권력 독점에 대한 불신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세 수도는 밖에서 보면 막대한 낭비지만 안에서는 국가의 파열을 막아준 완충 장치였다. 한 도시에 통치 기구를 몰아주려 했다면 연방은 시작도 하기 전에 깨졌을 공산이 크다. 연방의 헌법이 수도의 이름을 비워둔 배경에는 특정 세력의 권력 독점을 막으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비효율을 알면서도 감내하는 타협 위에 오늘의 남아공이 서 있다. 1910년 연방에 합의한 대표들은 누구도 국가의 심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셋으로 나눴다. 셋으로 나눈 대가는 지금도 해마다 돌아온다. 해마다 의회 개원 소식이 들리면 프리토리아 청사의 관료들은 서류 상자를 챙겨 공항으로 향한다. 1910년 5월 31일 체결된 합의에 따라 남아공 정부는 오늘도 프리토리아와 케이프타운 사이 1,300킬로미터 하늘길에 관료들을 실어 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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