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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주의 이름 지은 창시자...자신이 만든 단어에 던진 반기
1890년 빈에서 처음 활자로 찍혀...국가 건설 환멸 느끼고 반대자로 돌아서

1890년 4월 1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하던 문필가 나탄 비른바움은 자신이 창간한 격주간지 『자립』에 짧은 글 한 편을 실었다. 그는 흩어진 유대인의 귀환 운동을 설명하며 독일어로 "치오니스무스(Zionismus)", 곧 유대 민족주의를 뜻하는 시온주의라는 말을 인쇄물에 처음 활자로 찍었다. 예루살렘의 시온산에서 이름을 딴 이 단어는 당시만 해도 빈 대학 유대인 학생 동아리 주변을 맴돌던 낯선 말이었다.
시온주의는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를 세워 흩어진 민족을 결집하려는 민족주의 운동을 뜻한다.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 유대인을 겨냥한 유혈 약탈과 폭동이 잇따르자 유럽 전역의 유대 지식인 사회는 동요했다. 법적 권리를 얻어 현지 사회에 동화되려던 시도는 거센 반유대주의 장벽에 부딪혔고 차라리 고대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 독립된 삶의 터전을 일궈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프랑스 파리에서 드레퓌스 사건을 취재하던 빈의 언론인 테오도어 헤르츨이 1896년 소책자 『유대인 국가』를 펴내며 운동은 전환점을 맞았다. 정작 헤르츨은 비른바움이 이미 시온주의라는 말을 만들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작가 비른바움은 헤르츨의 글을 서평으로 다루고 자신이 쓴 책을 보내며 교류를 텄다. 이듬해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제1차 시온주의자 총회에서 헤르츨이 연단에 올랐을 때 비른바움이 초대 사무총장을 맡았다.
하지만 운동이 조직을 갖추자마자 국가의 자리를 둘러싼 균열이 드러났다. 헤르츨을 비롯한 외교 중심 지도부는 영토의 상징성보다 주권 확보를 앞세웠다. 기자 출신 헤르츨은 아르헨티나의 평원을 대안으로 검토했고 영국 정부가 제안한 동아프리카 케냐 고원 일대에 자치 식민지를 세우는 방안을 총회 표결에 부쳤다. 아프리카에 국가를 세우자는 구상은 동유럽 유대인들의 거센 반발을 샀고 결국 운동 내부의 극심한 분열 끝에 부결됐다.

국가의 물리적 뼈대를 서두르는 정치적 움직임은 문화적 반발을 불렀다. 고대 히브리어를 일상어로 되살리려는 노력이 이어졌지만 동유럽 유대인 대다수는 일상어인 이디시어를 쓰고 있었다. 비른바움은 헤르츨식 정치 외교가 민족의 정신적 자산을 국가라는 틀에 끼워 맞추려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세속 정부를 세우는 일보다 유대 민중의 언어와 자치를 지키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보아 시온주의 기구와 갈라섰다.
기구를 떠난 비른바움은 세계 최초의 이디시어 회의를 주도한 뒤 점차 종교적 전통으로 돌아갔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정통파 유대교 조직인 아구다트 이스라엘의 사무총장을 맡은 그는 세속적 시온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신앙과 도덕을 지키던 민족이 세속 권력과 군사력을 숭배하는 근대 국가를 모방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민족주의를 현대의 우상이라 비판했다.
시온주의 세력은 분열과 논쟁을 거쳐 1948년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을 세웠다. 하지만 빈의 작은 잡지에서 그 이름을 처음 종이에 인쇄했던 비른바움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처음 만든 말이 정치적 국가 건설의 깃발로 굳어지는 모습을 보며 깊은 유감을 표했고 말년의 망명지 네덜란드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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