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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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코뮌의 불길과 사라진 파리의 호적부

시청과 시테섬 사법궁에서 호적 약 800만 건 소실...25년 복원에도 약 3분의 1만 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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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코뮌 화재2분

Illustration by Gemini

1871년 5월 파리 코뮌 화재 당시 파리 경찰청 서류는 대부분 불탔지만 일부 문서 상자는 보존됐다. 이 문서 상자들은 코뮌 화재에 앞선 포위전 당시 프로이센군의 포격으로부터 루브르 박물관의 밀로의 비너스 조각상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한 예루살렘가 지하 공간에 보관돼 있었다. 이 문서 상자들은 조각상 받침대로 쓰이고 있었다.

코뮌은 1871년 3월 봉기 이후 파리를 장악한 혁명 자치정부로 베르사유에 자리 잡은 프랑스 정부와 맞섰다. 파리 코뮌 화재는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이어진 "피의 일주일" 동안 베르사유 정부군이 파리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대규모 파괴를 뜻한다. 도시 곳곳에는 정부군의 포격으로 일어난 불과 코뮌 측이 퇴각하며 지른 불이 뒤섞였다.

코뮌 측이 불을 지른 대표적인 건물은 나폴레옹 3세의 황궁이었던 튈르리궁이다. 5월 23일 정부군이 진격해 오자 파리 방위 지휘관 쥘 베르제레는 군사회의를 거쳐 궁에 불을 지르기로 결정했다.

도시의 기록을 지키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국립문서고에서는 직원들이 방어에 나섰고 코뮌이 국립인쇄소 대표로 임명한 루이 기욤 드보크는 문서고장에게 문서고 건물에 대한 방화와 파괴 시도를 저지할 권한을 담은 문서를 전달했다. 직원들은 이 문서를 근거로 진입하려던 코뮌군에 철수를 요구했다. 다만 국립문서고가 보존됐다고 해서 파리 시민의 출생, 혼인, 사망 기록까지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그 기록의 원본과 이를 대체할 부본은 다른 두 건물에 있었다.

1871년 5월 24일 파리 시청과 센강 시테섬에 있는 사법궁이 불탔다. 시청에는 16세기부터 이어져 온 성당 교구 장부와 1792년부터 1859년까지의 시민 호적 원본이 보관돼 있었다. 사법궁에 보관하던 부본도 함께 불타면서 1860년 이전 호적 약 800만 건이 거의 모두 소실됐다. 원본을 잃었을 때 대신 확인할 수 있는 부본마저 불탄 것이다.

1871년 5월 화재로 전소된 파리 시청사의 외벽 잔해. 위키피디아

불탄 호적 장부를 복원하는 일은 법무부 소속 위원회가 감독하고 센 지역 행정기관 산하 조직이 맡았다. 복원 담당 조직은 시민들이 제출한 개인 서류와 교회 기록 등 다른 곳에 남은 자료를 모아 호적을 재구성했다. 호적 복원 작업에서는 불탄 원본 대신 남은 증빙을 토대로 출생과 혼인과 사망 사실을 다시 기록했다.

복원 위원회는 1872년 설치돼 1897년 해산할 때까지 25년 동안 활동했다. 이 기간에 복원된 호적은 266만6000건으로 소실된 호적 약 800만 건의 약 3분의 1이었다. 복원된 기록도 대부분 19세기 것이었다. 일부 정보는 되찾았지만 수백 년에 걸쳐 쌓인 호적의 공백을 모두 메우지는 못했다.

불탄 건물의 경우 재건과 철거가 진행됐다. 파리시는 시청 외관을 예전 모습대로 재현해 1882년 재건을 마쳤다. 튈르리궁 잔해가 1883년 철거된 뒤 그 자리는 정원으로 바뀌었다. 건물의 재건과 철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호적 복원 작업은 이어지고 있었다.

밀로의 비너스 곁에서 화재를 피한 경찰청 문서 상자에는 원본이 보존됐다. 시청과 사법궁에서 불탄 호적은 시민과 교회 등이 남긴 다른 서류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그러나 그 서류들로도 재구성하지 못한 출생과 혼인과 사망 기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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