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야기
초현실주의, 무의식의 자유 외치며 주먹다짐과 파문으로 세운 제국
1924년 브르통의 선언과 난투극...교황의 파문장 찢고 나간 이탈자들이 연 현대 시각 언어

1924년 10월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극장 앞에서 난투극이 벌어졌다. 초현실주의 운동의 중심에 선 프랑스 시인 앙드레 브르통과 독일계 시인 이반 골이 서로 주먹을 휘두르며 멱살을 잡았다. 보름 전 골이 먼저 선언문을 발표하자 브르통은 이름을 가로챘다며 물리적 충돌을 일으켰다. 무의식의 해방을 외친 예술 운동은 단어의 소유권을 다투는 주먹다짐으로 첫 장을 열었다.
초현실주의는 1920년대 초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된 20세기 전위 예술 운동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극을 겪은 예술가들이 이성의 억압에서 벗어나 무의식의 절대적 자유를 찾으려 결성했다. 당시 수적 우세로 상대를 제압한 브르통은 곧바로 자신의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군 신경정신과에서 포탄 충격 환자들을 돌보며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익힌 의학도 출신이었다. 선언문은 초현실주의를 “이성에 의한 모든 통제가 배제되고 일체의 미학적·도덕적 선입견에서 벗어난 순수한 심리적 자동기술”이라고 정의했다. 논리와 이성이 인류를 참혹한 참호전으로 몰아넣었으니 통제받지 않는 꿈과 무의식의 연상 작용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절대적 자유를 약속한 운동은 곧장 교조적 통제의 굴레에 갇혔다. 브르통은 동료들의 작품과 사상을 검열하는 “초현실주의의 교황”을 자처했다. 처음에는 우연의 개입이 적다는 이유로 붓과 캔버스를 불신하다가 독일 화가 막스 에른스트의 문지르기나 데칼코마니 같은 기법이 자리를 잡자 뒤늦게 시각 예술을 교리 안으로 받아들였다. 브르통은 정기적으로 동료들의 도덕적 자격을 심사했고 정치 노선과 규율에 조금이라도 이견을 보인 예술가는 가차 없이 쫓아냈다.
5년 뒤 제2차 선언을 앞두고 사상 검증이 가혹해지자 집단 안에서 거센 반발이 터져 나왔다. 프랑스 시인 로베르 데스노스와 화가 앙드레 마송, 극작가 자크 프레베르 같은 핵심 동료들이 줄줄이 쫓겨났다. 축출당한 예술가들은 브르통에게 가시관을 씌운 풍자 팸플릿 《시체》를 인쇄하며 맞섰다. 이성의 감옥을 깨부수겠다던 지도자가 정작 가장 옹졸한 사상 심문관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역설적이게도 초현실주의는 교황의 파문장을 찢고 나간 이탈자들을 통해 세계적 시각 언어로 도약했다.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가 선보인 낯선 사물의 기묘한 병치는 벨기에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파이프와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녹아내리는 시계로 이어졌다. 훗날 브르통은 상업주의와 파시즘 옹호를 문제 삼아 달리를 쫓아내며 “달러를 탐하는 자”라는 멸칭을 붙였지만 달리가 그린 기괴한 캔버스는 대중의 머릿속에 초현실주의의 얼굴로 자리 잡았다.
교조적 순수성에 매달렸던 파리의 모임은 흩어졌지만 이들이 벼려낸 낯선 충돌의 문법은 현대 문화 곳곳에 뿌리내렸다. 일상적인 물건을 엉뚱한 공간에 놓아 충격을 주는 전치(dépaysement) 기법은 현대 광고와 패션 화보의 기본 문법으로 정착했다. 100년 전 파리의 두 시인이 멱살을 잡았던 그 불온한 단어는 오늘날 스마트폰 화면과 영화의 몽타주 속에서 매일 새로운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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