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야기
참호의 피비린내 지우려 수정을 택한 크리스털 큐비즘의 도피
포탄 쏟아지자 화폭에서 사람 지워...기하학 평면으로 피해 현대 디자인 낳아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프랑스 시인 쥘 로맹이 조각가 자크 립시츠를 찾아와 무엇을 만드느냐고 물었다. 립시츠가 "광물인 수정처럼 순수한 예술"을 만들고 싶다고 답하자 로맹은 "수정에 대해 아는 게 뭐냐"며 비웃었다. 그 말에 립시츠는 자신이 생각한 수정이 생명 없는 무기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 포탄이 쏟아지고 참호에서 살점이 튀던 전장 한복판에서 예술가들은 생생한 현실을 뒤로하고 차가운 기하학의 껍질 속으로 들어갔다. 대상을 부수던 복잡한 기법을 버리고 화폭에 평평한 색면과 뼈대만 남긴 이 화풍은 훗날 비평가 모리스 레날이 "크리스털 큐비즘"이라 부른 사조의 시작이었다.
크리스털 큐비즘은 1915년경 사물을 여러 각도로 쪼개는 미술 유파인 입체파 화가들이 전쟁의 참상을 피해 기하학적 질서를 찾고자 평평한 색면을 앞세운 미술 양식을 가리킨다.
전쟁 전 입체파 화풍은 복잡했다. 화가들은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쪼개고 다차원 시공간과 철학 이론, 도시의 속도감까지 화폭에 담았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자 프랑스 화가인 장 메체제와 알베르 글레즈, 조르주 브라크, 페르낭 레제가 군에 징집됐다. 인간의 몸이 포탄 앞에서 무력하게 부서지는 광경을 목격한 이들에게 이전의 지적 유희는 빛을 잃었다. 파리에 남거나 전선에서 붓을 쥔 이들은 화폭에서 인간의 곡선을 지웠다. 전장의 참상에서 멀어지려면 구체적인 형체를 지워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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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도시 툴에서 복무하던 알베르 글레즈는 군의관을 그리면서도 살갗의 표정을 배제했고, 그 자리를 넓고 평평한 색면과 대각선, 둥근 호가 겹치는 순수 구조가 메웠다. 의무병으로 참상을 겪은 장 메체제 역시 글레즈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음은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증오한다"고 썼다. 그는 수학 정리를 탐독하며 "모든 것은 수"라고 단언했다. 주관이나 문학적 비유는 "박제된 토마토" 같은 군더더기일 뿐이었고, 캔버스는 평면의 이동과 회전이라는 규칙으로 통제되는 결정체여야 했다.
비평가 루이 복셀은 이를 입체파의 종말로 보았다. 그는 주간지에서 "입체파는 무너지고 증발하고 있다"며 메체제가 "버려진 교리의 마지막 생존자"가 될 것이라 장담했다. 하지만 총성이 멎자마자 화상 레옹스 로젠베르크의 화랑 "레포르 모데른"에서 반격이 시작됐다. 앙리 로랑스를 시작으로 메체제, 레제, 브라크, 후안 그리스, 파블로 피카소의 개인전이 이듬해 여름까지 매달 이어졌다. 전후 사회는 흔들리지 않는 질서를 바랐고, 수정처럼 닫힌 평면은 "질서로의 복귀"를 상징하는 깃발이 됐다.

이 흐름의 정점에는 후안 그리스가 있었다. 그리스는 대상을 관찰해 쪼개는 대신 평평한 기하학적 면들을 화폭에 먼저 올렸고, 색면의 비례가 균형을 이룬 뒤에야 비로소 기타의 윤곽이나 옷자락 무늬를 얹었다. 그림의 주인공은 면과 면이 맞물리는 기하학적 뼈대였으며, 악사나 악기는 그 구조를 거들 뿐이었다. 예술을 모방에서 떼어내 자립적인 사물로 세운 시각 언어였지만, 그 대가로 화폭 안에서는 인간의 숨결과 시대의 비명이 지워졌다.
전쟁의 상처를 지우려 태어난 이 차가운 기하학은 화랑 벽면에 머물지 않았다. 화가 아메데 오장팡과 프랑스 건축가인 르코르뷔지에는 군더더기 없는 면 분할을 이어받아 순수주의를 선언했고 이는 바우하우스와 현대 디자인의 기본 문법으로 굳어졌다. 오늘날 스마트폰 화면의 네모난 앱 아이콘, 장식을 덜어내고 평평한 면과 선으로 정렬된 플랫 인터페이스는 당시 화가들이 고안한 수학적 평면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18년 12월 18일 파리 바움가 19번지에서 문을 연 전시는 그렇게 현대인이 매일 만지는 사각형의 규격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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