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그림 이야기

건축 수업 없던 바우하우스...1929년 흑자 돌려세운 롤 벽지

그로피우스 공예 사치품 한계 부딪혀...마이어 취임 후 표준 규격 도입해 대중 일상 바꿔

리지

바우하우스2분

바우하우스는 미술과 공예를 통합하려던 독일의 조형 학교였다. 이 학교는 1919년 독일 중부 도시 바이마르에서 문을 열었다. 개교와 함께 초대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는 거창한 선언을 내걸었다. 그는 "모든 조형 활동의 궁극적 목표는 건축"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학교에는 정작 8년 동안 건축 강의가 없었다.

집을 짓는다는 학교 이름과 달리 현실은 딴판이었다. 학생들은 건축 대신 공방에 모여 흙을 빚고 직물을 짰다. 이들은 쇠를 두드리며 파격적인 시제품들을 쏟아냈다. 학생들은 공예와 예술의 벽을 허물겠다는 구호를 앞세웠다.

이 실험실에서 화가 요하네스 이텐과 바실리 칸딘스키가 조형 원리를 지도했다. 그 가르침 속에서 가구 디자이너 마르셀 브로이어가 강철 파이프로 짠 의자가 세상에 나왔다. 공예가 마리안네 브란트의 은 주전자 역시 같은 공방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손으로 다듬은 이 물건들은 노동자의 임금을 훌쩍 웃돌았다.

1923년 바우하우스 바이마르 전시회 포스터. 요스트 슈미트, 위키피디아

비싼 수공예의 낭만은 곧 학교의 재정 위기로 이어졌다. 스위스 건축가 한네스 마이어가 바로 이 위기에서 돌파구를 열었다. 1928년 교장에 오른 마이어는 "사치품 대신 인민의 필요"를 내세웠다. 그는 순수 미학을 덜어내고 치수와 원가 계산을 앞자리에 두었다.

그는 규격화된 기성 부품을 쓰고 공장의 기계와 학생들의 손끝을 연결했다. 이 대량 생산 체제에서 뜻밖의 효자 상품이 나왔다. 독일 벽지 제조사 라슈와 손잡고 출시한 롤 벽지가 그 주인공이었다. 화려한 꽃무늬를 지우고 단순한 색의 결만 남겼다.

마리안네 브란트가 디자인한 반구형 주전자. 사진 크리스토스 비토라토스, CC BY 2.5, 위키피디아

도배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춘 이 벽지는 독일 전역의 가정으로 퍼져 나갔다. 바우하우스는 벽지 판매 수입에 힘입어 1929년 첫 흑자를 달성했다. 전설적인 의자가 아닌 저렴한 종이 벽지가 파산 직전의 학교를 구했다.

오늘날 미술관에는 크롬 도금한 강철 파이프 의자와 은 주전자가 바우하우스의 상징으로 걸려 있다. 높은 가격표가 붙은 이 물건들은 소수 수집가의 방을 차지하고 있다. 바우하우스가 넘어서려 했던 사치품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 정작 기성 규격으로 찍어낸 벽지가 학교 살림을 책임졌다.

바우하우스의 이상은 오늘날 일상의 규격 안에 스며 있다. 부품을 맞추는 조립식 가구와 아파트의 흰 벽지가 그렇다. 지하철역의 단순한 서체도 군더더기를 덜어낸 산업 규격에 빚을 졌다. 1933년 나치의 탄압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롤 벽지 한 품목이 바우하우스의 재정을 지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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