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그림 이야기

나비파, 캔버스 액자 밖으로...선명한 색면을 벽지와 실내 장식으로 확장

작은 판자 위의 원색 얼룩에서 출발해 미술관과 일상의 벽을 허문 19세기 프랑스 화가들의 기록

리지

나비파4분

1888년 10월 파리의 미술학교 아카데미 쥘리앙의 작업실에서 스물세 살 화가 폴 세뤼지에는 이 학교 동료들에게 훗날 젊은 화가들의 모임인 나비파의 출발점이 된 작은 나무판 그림을 선보였다. 그림의 바탕인 나무판은 가로 21.5cm, 세로 27cm 크기였다. 나무판 위에는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노랑과 빨강, 초록 물감 덩어리가 엉겨 있었다.

이 그림은 세뤼지에가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의 예술가 마을 퐁타방에서 화가 폴 고갱의 지도를 받으며 그린 풍경화로, 본래 제목은 "사랑의 숲 풍경"(Paysage du Bois d'Amour)이었다. 사랑의 숲은 세뤼지에가 그림에 담은 장소의 이름이다. 당시 아카데미 쥘리앙의 동료들은 형태를 단순화한 이 풍경화를 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작품으로 받아들여 "부적"(The Talisman)이라 불렀다.

이 소품 하나에 충격을 받은 아카데미 쥘리앙의 젊은 미술학도들은 기성 화단의 사실주의에서 벗어나 회화의 기초를 다시 세우기로 뜻을 모았다. 이때 화가 모리스 드니를 비롯한 동료들이 세뤼지에 주위에 모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나비"(Nabis)라 부르며 회화의 사실적 착시를 걷어내고 평면적인 색채 표현과 일상의 장식을 연구했다. 화가 에두아르 뷔야르는 1890년 모임에 합류했다.

나비라는 이름은 언어학자인 카잘리스가 고대 히브리어 성서에서 예언자를 가리키는 단어 느비임(nebiim)에서 따왔다. 나비파 화가들은 고대 예언자가 이스라엘을 일깨운 것처럼 관습에 갇힌 현대 미술을 구원할 예언자가 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이들은 진지함과 장난기가 섞인 비밀결사처럼 교류했다.

"부적"에서 세뤼지에는 나무와 물가의 형태를 단순화해 넓고 선명한 색면을 나란히 배치했다. 나무줄기와 물에 비친 모습은 남아 있지만, 명암으로 나무의 둥근 부피를 세밀하게 표현하는 묘사는 줄었다. 풍경의 깊이보다 화면 위에서 색과 형태가 어떻게 어울리는지가 두드러졌다.

1890년 8월, 모임의 이론가였던 열아홉 살 모리스 드니는 잡지 "아르 에 크리틱"에 기고한 글에서 나비파의 핵심 강령을 세상에 알렸다. 드니는 "기억하라, 그림이란 전쟁터의 군마나 여성 누드나 어떤 일화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일정한 질서로 모인 색채로 뒤덮인 평면"이라고 썼다. 드니의 글은 "부적"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의 단순화와 색면의 배치를 회화의 원리로 설명한 선언이었다.

폴 세뤼지에의 "부적". 위키피디아

나비파는 회화와 일상생활의 장식을 연결하고자 했다. 나비파는 일본 우키요에 판화의 영향을 받은 넓은 색면과 뚜렷한 윤곽, 무늬를 병풍과 벽면 장식화에도 활용했다. 나비파 화가들은 부유한 후원자의 집을 위한 주문 제작과 제조업체에 제출할 도안 작업을 병행했다.

뷔야르는 1895년 후원자인 타데와 미시아 나타송의 집을 위해 "앨범" 연작 다섯 점을 그렸다. 뷔야르는 여성과 꽃이라는 공통 주제를 다루면서 그림마다 크기와 색, 구성에 차이를 뒀다. 나비파의 실내 장식화 중에는 액자 없이 무늬 있는 벽지에 바로 붙여 전시한 작품도 있었다. 나비파 화가들은 그림 속 무늬와 주변 벽지의 무늬를 함께 보게 하는 방식으로 회화를 방의 장식과 연결했다.

화가 폴 랑송은 1893년 런던의 벽지 제조업체 아서 샌더슨 앤드 선스의 주문을 받아 벽지 도안을 그렸다. 그중 "토끼들"에는 무를 먹는 토끼 세 마리가 식물과 함께 배치돼 있다. 랑송은 동물과 식물을 벽면을 채울 무늬로 다뤘지만, 이 도안은 실제 벽지로 제작되지 않았다. 나비파가 생활 장식으로 활동을 넓혔다는 사실에는 이처럼 도안에 그친 작업도 포함된다.

특히 뷔야르와 화가 피에르 보나르는 집 안의 밀폐된 방과 거실을 그리는 앵티미슴(Intimism) 화풍을 개척했다. 이들의 그림에서는 방 안의 인물이 화려한 꽃무늬 벽지와 줄무늬 원피스, 융단과 가구의 질감 속에 완전히 스며들었다. 이처럼 사람과 배경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화면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장식 패턴을 이뤘다. 두 화가는 인간의 형상조차 평면을 구성하는 색면의 한 조각으로 다루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에두아르 뷔야르의 "바느질하는 여인". 위키피디아

나비파 화가들은 1900년 무렵 각자의 작업 방향을 따라 갈라졌다. 모임이 흩어진 뒤에도 보나르와 뷔야르는 인물과 실내의 무늬를 한 화면에 결합하는 회화를 이어갔다. 단체의 활동이 끝난 시점과 각 화가가 평면성과 장식성을 탐구한 기간은 달랐다.

스스로를 예언자라 불렀던 청년들의 결사는 십여 년 만에 흩어졌지만, 이들이 던진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1909년 드니는 예술을 자연의 사진 같은 모사를 넘어, 자연을 계기로 삼은 인간 정신의 창조로 설명했다. 풍경과 사람을 어떤 형태와 색의 질서로 그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모임이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

오늘날 책 표지나 벽지에서 그림자의 명암을 줄인 형태와 넓은 색면, 반복되는 식물무늬를 볼 때 나비파의 작품과 비교할 수 있다. 이런 비교를 통해 색과 무늬를 배치하는 방식에서 조형적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세뤼지에가 1888년 퐁타방에서 고갱의 지도를 받아 그린 작은 나무판 그림에도 형태를 단순화한 풍경이 선명한 색면으로 나란히 배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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