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흐름
기준금리 3%인데 한은 창구는 연 1.25%, 예산서를 지나지 않는 최대 2,700억원
한은, 준재정 이유로 2개 프로그램 정리...남겨 둔 창구는 1994년 도입 뒤 한도 그대로
1994년 3월 한국은행은 자동재할인제도를 폐지했다. 시중은행이 정책 대상 부문에 자금을 빌려주면 대출액의 일정 비율을 한은이 자동으로 메워 주던 지원 창구였다. 폐지 배경을 두고 국가기록원은 "재할인규모를 신축적으로 조정하기가 어려웠다"고 적었다. 자금을 자동으로 대주다 보니 유동성 공급 규모를 은행의 대출 실적이 좌우하는 구조였다. 이에 한은 통화정책 의결 회의체인 금융통화위원회가 총액을 먼저 정하고 은행별 한도를 나누는 총액한도대출 제도를 대신 도입했다. 자금 공급을 탄력적으로 조절하겠다는 명분이었다.
이 총액한도대출이 오늘날 금융중개지원대출로 이어졌다. 시중은행이 중소기업 대출 등 지정 분야에 자금을 내주면 실적에 맞춰 한국은행이 낮은 금리로 자금을 지원하는 제도로, 1994년 3월 한은이 자동재할인 대체 창구로 마련해 2013년 6월 지금의 이름을 붙였다. 금융통화위원회가 프로그램별 한도와 금리를 정해 운용한다.
이런 정책금융 창구의 뿌리는 더 깊다. 1962년 도입된 선별적 재할인제도는 정부가 육성할 산업을 정하면 은행이 자금을 대출하고 한은이 저리로 자금을 보태는 방식이었다. 발전국가 시절에 튼 이 통로는 수출과 농업, 중소기업을 든든히 뒷받침했다. 육성 대상은 정부가 골랐고 소요 비용은 중앙은행이 떠맡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중앙은행 대출을 유동성 조절 본연의 수단으로 전환하자는 논의가 이어졌으나 이 틀은 그대로 유지됐고, 2013년 6월 이름만 다시 바뀌었다. 60여 년 세월 동안 명칭은 세 차례 바뀌었어도 자금 흐름은 그대로 이어졌다.
지난 7월 23일 한은이 이 제도를 13년 만에 다시 손질했다. 무역금융지원과 신성장·일자리지원 2개 프로그램은 단계적으로 축소해 폐지하기로 했다. 한은은 두 제도가 "준재정적" 성격을 띤 채 장기간 고정적으로 운용됐다고 밝혔다. 중앙은행 스스로 정책대출을 재정 활동이라 규정한 것이다. 진단 자체는 틀리지 않다.
재정적 성격은 대출 금리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한은은 이 제도를 "은행의 중소기업대출 실적 등에 따라 한국은행의 저리자금을 지원하는 제도"라고 설명한다. 관건은 그 자금이 얼마나 싼가다. 현재 4개 프로그램에 적용되는 금리는 모두 연 1.25%인 반면, 8월 27일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두 달 연속 올리면서 연 3.00%가 됐다. 격차가 1.75%포인트까지 벌어졌다. 전체 한도 30조원 중 해당 프로그램들에 배정된 15조7000억원(52.3%)을 은행권이 전액 소진한다고 가정하면, 한은이 1년에 덜 받는 이자만 2,700억원가량이다. 실제 대출 잔액은 한도에 못 미칠 수 있으므로 이는 최대치에 해당한다.
한은이 덜 받은 이자는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한국은행법 제99조에 따르면 한은은 결산 순이익의 30%를 법정적립금으로 유보하고 나머지를 정부 세입으로 납부해야 하므로, 이자를 덜 거두면 당기순이익이 줄어 국고 납입액도 그만큼 줄어든다. 결국 중소기업이 받은 금리 혜택을 국가 재정으로 메워 준 꼴이다. 그러나 이런 지원은 국회의 예산 심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한은이 2025년 결산에서 정부 세입으로 납부한 금액은 10조7050억원에 달하지만, 지원 창구에서 먼저 줄어든 이자는 결산 전에 빠지므로 정부 예산서 어디에도 적히지 않는다. 국회의 감시를 거치지 않는 숨은 통로다.
여기까지만 짚어 보면 이번 개편 방향은 긍정적이다. 중앙은행이 시중은행 대출을 유도해 통화정책 파급 경로를 넓히는 정책은 세계적으로도 드물지 않고, 유럽중앙은행(ECB) 역시 은행의 기업 대출 실적에 연동해 저리로 자금을 빌려주는 장기대출 프로그램을 여러 차례 가동했다. 한은이 이번에 제시한 명분 역시 통화정책 수단으로서의 기능 강화인 만큼 취지 자체를 탓하기는 어렵다.
다만 유럽중앙은행의 대출 프로그램에는 명확한 만기와 종료 시점이 정해져 있었다. 인플레이션이 닥치자 유럽중앙은행은 대출 조건을 바꿔 조기 상환을 유도했고, 시중은행들이 2조 유로 넘는 자금을 상환하며 2024년 12월 마지막 상환을 끝으로 프로그램은 종료됐다. 통화정책 수단의 기본 구조는 이래야 한다. 위기에 열고, 목적을 다하면 닫는다. 반면 1994년 3월 문을 연 한은의 창구는 30년 넘게 닫힌 적이 없다.
문제는 한은이 남겨 두기로 한 대목에 있다.
2021년 9월 한은 통화신용정책보고서에 실린 한도표와 현재를 비교하면 무역금융지원은 2조5000억원에서 1조5000억원으로 축소됐다. 신성장·일자리지원은 13조원에서 8조원으로, 중소기업대출안정화는 5조5000억원에서 3000억원으로 줄었고, 13조원 규모의 코로나19 피해기업 지원 프로그램은 아예 폐지됐다. 5개 프로그램 중 4개가 줄거나 없어지는 사이 지방중소기업지원 5조9000억원만 요지부동이었다. 그동안 기준금리가 0%대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3%대로 치솟는 동안 한은은 남은 4개 프로그램의 지원 금리를 0.25%에서 1.25%로 일괄 인상했다. 다른 프로그램의 한도는 경기 여건에 맞춰 조정하면서도 지방중소기업지원 한도에는 끝내 손을 대지 않았다. 한은이 앞으로 핵심 축으로 삼겠다는 프로그램이 바로 이 지방중소기업지원이다.
지방 중소기업의 금융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현실 진단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방에 자금이 더 흘러가야 한다는 당위와 대출 한도가 12년째 같은 수치로 묶여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별개다. 경기 변동에 반응하지 않는 한도는 결국 정책적 관성으로 굳어진다. 한은 스스로 내세운 준재정이라는 잣대를 엄격히 적용한다면, 폐지 대상보다 존치 대상 프로그램이 더 큰 모순을 안고 있다.
이번 개편의 성패에 대한 평가는 은행별 한도 배정 방식이 대출 순증액 기준으로 바뀌는 2027년으로 넘겨도 늦지 않다. 지켜봐야 할 지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지방중소기업지원 한도 5조9000억원을 어떻게 조정하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신설되는 중소기업신용연계지원의 대출 금리가 기준금리 변동에 연동해 움직이는가다. 이 두 수치는 모두 한은이 해마다 내놓는 공식 통계에 명확히 기록된다. 기준금리가 3% 이상으로 추가 인상되는 상황에서도 연 1.25% 금리가 고정돼 있다면, 그 자금은 더 이상 통화정책 수단이라 부르기 어렵다.
한은이 이번 개편을 발표하며 강조한 목표는 경기 상황에 따른 탄력적 운용이다. 이는 1994년 자동재할인제도를 폐지하면서 내세웠던 명분과 정확히 겹친다. 32년 동안 똑같은 약속을 두 번 되풀이한 꼴이다. 당시 개혁은 "자동"이라는 단어만 뗐을 뿐 지원 창구 자체는 그대로 남겨 두었다. 한은은 오는 2027년에 이르러서야 그 창구의 유량 조절 밸브를 손질하겠다고 예고했다. 하지만 밖으로 새 나가는 돈을 잴 계량기 설치 계획은 끝내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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