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흐름
배관공 부른 AI 일자리 호황, 밸브 열리면 닥칠 75만 개 사무직 소멸
데이터센터 인프라 건설로 일자리 급증...배관 완공되면 75만 개 사무직 소멸, 韓 청년층 고용 한파
챗GPT가 처음 나왔을 때 세상은 지적 노동의 종말을 두려워했다. 코드를 짜고 보고서를 쓰던 사무직부터 사라질 것이라는 경고였다. 기계가 인간 지능을 흉내 내기 시작했으니 책상부터 빌 계산이었다. 몇 해가 흘렀지만 지금 고용 통계의 숫자는 딴판이다. 미국의 실업률은 4.1% 안팎에 그치고, 일자리 문은 닫히지 않았으며 채용 시장은 오히려 붐빈다. 그렇다면 화이트칼라의 종말은 어디로 갔는가.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의 9월 분석은 이 수수께끼를 푼다. 이 분석을 보면 생성형 AI 등장 뒤 미국 경제에는 60만 개 넘는 일자리가 순증했는데, 일자리는 데이터센터를 짓고 전기를 끌어오는 인프라 현장에서 솟았다. 데이터센터 건설과 전기 설비 부문에서만 32만 명 추가 고용이 생겼고, AI 시스템을 구축하고 연동하는 전문 기술 서비스 분야에는 73만 개 일자리가 더해졌다. 알고리즘이 일자리를 지우기 전에 사람이 먼저 불려갔다. 철골을 세우고 전선과 파이프를 묻는 물리적 노동이 고용을 받쳤다.
기술 혁신의 역사를 보면 이 시간차는 낯설지 않다. 19세기 영국의 철도 광풍 때도 그랬다. 증기기관차가 말을 대신하면 마부와 일꾼이 거리로 내몰릴 것이라는 비관론이 짙었지만, 철도가 깔리는 동안 고용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20만 명이 넘는 인부가 곡괭이를 들었고, 산을 뚫고 철길을 놓느라 건설 현장은 최대 호황을 누렸다. 철강 공장과 벽돌 가마, 침목 공장이 쉴 새 없이 돌아갔다. 공사 현장의 땀방울이 운송 노동자의 몰락을 덮었다. 닷컴 열풍 때도 양상은 다르지 않았다.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광케이블을 묻는 동안 배관공과 기술자가 일자리를 얻었다. 문명을 바꾸기 전에는 인프라를 까는 배관의 시대가 먼저 온다. 배관을 까는 동안 공사판의 노동이 넘쳐나 일자리의 종말은 뒤로 미뤄진다.
사람들은 흔히 인공지능을 허공의 클라우드로 여긴다. 하지만 지능의 실체는 결코 가볍지 않다. 수만 장의 가속기 칩을 식히는 수랭식 냉각 배관 시설, 도시 하나가 쓸 전력을 나르는 거대한 구리 전선이 그 바탕이다. 결국 지능의 본체는 전력과 열을 다루는 배관 시설이다. 미국 노동통계국(BLS)의 장기 고용 전망에도 그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전력과 송배전 등 유틸리티 산업은 10년간 고용이 9.8% 늘어나 미국 주요 산업 가운데 가장 빠르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알파벳, 메타, 아마존 등 빅테크가 올 한 해 인프라에 쏟는 설비투자는 2,000억달러를 넘었다. 지능의 시대를 열기 위해 자본이 배관 공사판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인공지능이 새 일자리를 만든다는 반론도 있다. 효율이 오르면 노동 수요가 는다는 제본스의 역설이다. 프롬프트 엔지니어와 데이터 큐레이터 같은 직무가 생긴 것도 맞지만, 공사 현장의 소음을 기술의 고용 창출력으로 착각한 결과다. 대형 데이터센터 한 채를 짓는 동안에는 1,500명 넘는 건설 노동자와 배관공이 현장을 채운다. 냉각 밸브가 열리면 사정이 달라진다. 냉각수가 서버 사이를 돌기 시작하면 건물 안에 남는 상주 인력은 수십 명에 불과하고, 먼지를 털고 시설을 점검할 관리 인력만 남을 따름이다. 미국 노동통계국이 사무 지원 일자리가 10년간 75만 2,000개 사라진다고 내다본 이유이자 전체 직업군 가운데 가장 큰 감소 폭이다. 배관 공사가 끝나는 순간 지능은 사무실 책상을 겨눈다.
이 시간차가 만든 균열은 한국 경제에서 서늘하게 확인된다. 소프트웨어와 사무직 청년 고용은 꽁꽁 얼어붙었다. 국가데이터처의 7월 고용동향을 보면 청년 취업자는 1년 전보다 19만 1,000명 줄어 45개월 연속 감소세다. 청년 실업률은 6.8%로 올랐고 대졸 후 장기 미취업 청년은 48.6%에 달했다. 한국은행 분석대로 생성형 AI는 신입의 사다리를 먼저 걷어찼다. 문서 초안 작성과 기초 데이터 분석, 주니어 코딩 같은 정형 업무부터 자취를 감췄고, 시니어는 AI를 비서 삼지만 청년에게는 문이 열리지 않는다. 반면 초고압 변압기와 송배전 기기를 만드는 중전기 공장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미국 데이터센터로 보낼 변압기와 냉각 배관을 찍어내느라 10조원 넘는 수주 잔고를 쌓았고, 공장을 늘리며 생산직 인력을 대거 흡수한다. 소프트웨어 혁명의 과실이 청년 지갑 대신 배관 공장으로 흐르는 역설이다.
앞으로의 흐름을 가늠할 지표는 두 갈래다. 하나는 미국 상무부의 비주거용 건설 지출 추이다. 컴퓨터와 데이터센터 착공 지출로 배관 부설기의 고용 특수가 꺾이는지 본다. 국내에서는 국가데이터처의 정보통신업 청년 취업자 수 추이와 전력기기 업체의 분기별 수주 잔고 증감률을 함께 살펴볼 변수다. 변압기 공장의 초과 노동이 잦아들고 판교와 여의도의 사무직 감축이 통계로 가시화하는 변곡점을 맞게 된다.
충남 당진의 변압기 공장 마당에서 배관을 묶어 올리던 인부들의 땀방울은 언젠가 잦아든다. 철도 인부들이 철길을 다 깐 뒤 흩어졌듯 배관이 묻히면 인프라 호황도 걷힌다. 밸브가 열리고 차가운 냉각수가 돌기 시작할 때 파이프라인은 사람 없는 사무실로 이어진다. 미국 노동통계국은 8월 27일 장기 고용 전망을 냈다. 전체 일자리가 연평균 0.3% 늘어나는 사이 사무 지원직은 75만 2,000개 사라진다는 숫자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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