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흐름
다시 울리는 계산대, 2차 인플레이션의 청구서
미국 국채금리 4.8% 급등에 한국 물가 3.1% 반등...연착륙 환상 깨고 2,000조원 가계빚 옥죄는 2차 물가 충격

대형마트 계산대 앞에 선 손님은 계산대 벨트에 실린 장바구니 물건들을 바라본다. 계산대 벨트 위로 물건 바코드를 읽어내는 단말기가 신호음을 낼 때마다 결제 모니터에는 합산 금액이 빠르게 불어난다. 장바구니 물건이 다 지나가면 결제 버튼이 눌려 영수증이 출력되는 것이 통상적인 거래 순서다. 손님은 계산이 끝났다고 여기며 신용카드를 꺼내 든다. 그런데 계산대를 지키는 직원은 거래를 마감하지 않는다. 벨트 뒤편에서 미처 보지 못한 항목들이 줄지어 올라오더니 단말기가 다시 울리기 시작한다. 물류 할증료와 유류세, 관세 인상분이 품목마다 더해지며 화면의 최종 결제 금액이 가파르게 뛴다. 2026년 가을 세계 경제는 바로 이 계산대 앞에 서 있다. 2년 넘게 이어진 고금리 긴축 끝에 물가가 잡히고 충격 없는 경기 연착륙이 찾아왔다고 믿었던 안도감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멈춘 줄 알았던 계산대 화면이 켜지며 전 세계에 2차 인플레이션의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2차 인플레이션은 일시적 공급 충격이 진정된 뒤 임금과 서비스, 에너지 비용의 구조적 상승이 결합해 물가가 다시 오르는 현상이다. 지난 상반기까지만 해도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물가상승률이 2% 목표치로 순조롭게 수렴하고 있다는 낙관론에 젖어 있었다. 낙관론 속에서 경기 침체 없이 물가를 잡는 연착륙이 임박했다고 본 금융시장은 금리 인하 시간표를 앞다퉈 계산했다. 하지만 최근 잇달아 발표된 거시경제 지표를 보면 그 기대는 섣부른 오판이었다. 실제로 미국 뉴욕 채권시장에서 10년 만기 미 국채금리는 연 4.80%까지 치솟으며 1년 8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30년 만기 국채금리도 연 5.34%로 뛰어올라 2007년 금융위기 직전 수준에 도달했다. 이처럼 물가가 내려앉지 않는데 돈을 빌리는 비용마저 급등하자 채권시장에서는 국채를 투매하는 발작이 되풀이됐다.
인플레이션의 귀환을 이해하려면 지난 30년간 이어진 저물가의 실체를 짚어봐야 한다. 1990년대 탈냉전 이후 이어진 이른바 대안정기는 중앙은행의 빼어난 통화 운용 덕분이 아니었다. 당시 중국의 저임금 공장들이 쏟아낸 저가 소비재, 러시아의 파이프라인이 유럽으로 공급한 저렴한 천연가스, 국경 장벽을 허문 자유무역이라는 삼각축이 대형마트의 상시 할인 매대 구실을 했다. 삼각축을 바탕으로 전 세계 생산망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작동하는 동안 제조품 가격은 구조적으로 낮게 유지됐고, 에너지와 원자재는 풍부하게 공급됐다. 각국 중앙은행은 이 할인 혜택을 마치 자신들이 금리를 정밀하게 조정한 결과로 여겼다. 이에 따라 금리를 조금만 올리면 물가가 잡히고 금리를 내리면 성장이 살아난다는 환상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 거대한 할인 매대는 이미 영구적으로 문을 닫았다. 실제로 미국과 이란의 무력 충돌이 격화되면서 원유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에서 유조선 피격이 잇따르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의 공급 차질 공포가 확산되자 뉴욕상품거래소에서 서부텍사스산원유 선물 가격은 단숨에 배럴당 90달러를 넘어섰고 북해산 브렌트유는 배럴당 94달러를 돌파했다. 물가 상승 압력은 유가에 그치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이 국가안보를 내세워 관세 장벽을 쌓고 공급망을 동맹국 중심으로 재편하며 저비용 분업 체계는 완전히 깨졌다. 여기에 선진국의 급격한 고령화에 따른 숙련 노동자 부족과 인공지능 데이터센터 가동을 위한 막대한 전력 소비가 더해졌다. 공장을 짓고 서버를 돌리는 모든 물리적 단계에서 이전에 없던 구조적 비용이 더해지고 있다.
물론 시장 일각에서는 이번 물가 반등을 일시적인 출렁임으로 해석하려는 주장이 만만치 않다. 이들은 중동의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고 공급망 병목이 해소되면 유가가 안정세를 되찾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지난해 통신 요금 감면의 기저효과가 사라지고 가공식품 출고가 인상이 마무리되면 물가상승률은 다시 2%대로 내려앉을 것이라는 논리도 뒤따른다. 무엇보다 각국 중앙은행이 수년째 기준금리를 높은 수준으로 유지해 온 만큼 누적된 긴축 효과가 가계 소비와 기업 투자를 위축시켜 결국 수요를 잠재울 것이라는 교과서적인 믿음이 여전히 확고하다. 이러한 수요 둔화가 물가를 다시 끌어내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낙관론의 뼈대를 이룬다.
하지만 이러한 반론은 2021년 물가 상승을 일시적인 병목으로 넘겼다가 통제력을 잃었던 실수를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다. 지금의 2차 인플레이션은 과열된 수요 대신 공급 체계 자체의 구조적 마찰에서 비롯됐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아무리 높여도 봉쇄된 해협의 위험 보험료를 낮추거나 새로 짓는 반도체 공장의 천문학적인 전력 단가를 깎을 수는 없다. 오히려 감당하기 어렵게 불어난 정부 부채가 통화 긴축을 무력화하는 상황이다. 실제로 미국 연방정부 부채는 40조 달러에 다가섰고 한 해 지불해야 하는 국채 이자만 1조 1,700억 달러로 국방 예산을 넘어섰다. 금리가 오를수록 정부가 지급하는 이자가 늘어나 민간으로 막대한 유동성이 다시 흘러 들어가는 역설이 나타난다. 통화정책이 재정의 거대한 팽창에 밀리는 재정 우위가 긴축의 고삐를 풀고 있다.
물가가 잡히지 않는 상태에서 채권금리가 치솟자 각국 중앙은행은 벼랑 끝으로 몰렸다. 30년 가까이 초저금리에 머물렀던 일본은행조차 10년 만기 국채금리가 연 3%를 돌파하자 추가 금리 인상과 공격적인 긴축을 공식화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역시 잭슨홀 회의 이후 시장의 조기 금리 인하 기대를 단호하게 차단하고 통화정책의 무게중심을 물가 안정으로 되돌렸다. 유럽 채권시장도 재정적자 확대와 에너지 가격 불안이 겹치며 독일과 영국의 국채금리가 연쇄 급등했다. 인플레이션을 잡으려면 금리를 더 올려야 하지만 금리를 올리면 부채 국가의 재정이 파탄 나고, 금리를 내리면 물가가 치솟는 진퇴양난의 덫에 걸렸다.
2차 인플레이션의 청구서는 한국 경제의 가장 취약한 고리를 곧장 파고들고 있다.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지난 8월 소비자물가는 1년 전보다 3.1% 오르며 두 달 만에 다시 3%대로 올라섰다. 휴대전화 요금 감면의 기저효과를 제외하더라도 공공서비스 물가가 6.5% 상승하며 25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뛰었고, 석유류 가격은 최고가격제 적용에도 14.2%나 올랐다. 에너지를 전량 수입하고 중간재 가공을 거쳐 수출하는 한국의 산업 구조상 대외 원가 상승은 시차 없이 생산자물가와 소비자물가로 옮겨붙는다. 국내 금융시장에서도 10년 만기 국고채 금리가 연 4.4%를 뚫고 올라서며 기업의 자금 조달 비용을 압박하고 있다.
국채금리 급등은 은행 창구를 거쳐 가계의 이자 부담을 옥죈다. 한국은행이 집계한 가계신용 잔액은 사상 처음으로 2,000조원을 돌파했다. 금융 시장의 기준점이 되는 국채금리가 오르면 은행의 조달 비용이 상승하고, 이는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 금리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대출금리가 0.5%포인트만 올라도 4억원의 주택담보대출을 안고 있는 가계는 해마다 200만원의 이자를 더 내야 한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지난 7월과 8월 두 달 연속 기준금리를 인상한 것도 물가와 환율의 상승 압력 때문이었다. 금리를 올리면 빚더미에 앉은 한계 차주와 자영업자가 쓰러지고, 금리를 묶어두면 미국과의 금리 격차로 자본이 유출되며 원화 가치가 떨어져 수입 물가가 폭등하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대형마트의 계산대는 닫히지 않았다. 컨베이어 벨트에 실린 물건의 가격표는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지난 30년간 누려온 세계화의 상시 할인은 끝났고, 공급망 단절, 에너지 위기, 통제 불능의 나랏빚이 청구한 진짜 원가가 모니터 위에 숫자로 찍히고 있다. 소비자와 투자자는 이제 인플레이션을 경제 환경의 새로운 상수로 받아들여야 한다. 4분기 시장 참여자들은 식료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물가의 기조적 상승세와 장기 국채금리의 기간 프리미엄 추이를 주시해야 한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오는 10월 기준금리 결정을 앞두고 9월 소비자물가 상승률과 2,000조원에 달하는 가계부채 동향을 첫 번째 점검 지표로 검토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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