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흐름
엔비디아의 환전창구, 실리콘 통화가 세운 성채
75% 마진으로 연산 화폐 발행하고 자사주 500억 달러 매입...고객사 부채 보증하며 굴리는 사설 중앙은행의 회전문

국경을 넘는 여행자는 가장 먼저 환전 창구와 마주한다. 두꺼운 아크릴 차단벽 아래 좁은 틈으로 지폐를 밀어 넣으면 창구 직원이 그날 고시 환율에 맞춰 현지 화폐를 내준다. 환전 창구를 거치지 않고서는 낯선 땅에서 밥 한 끼 먹거나 차를 타기도 어렵다. 환전 창구에서는 직원이 정한 교환 비율이 곧 법이다. 창구를 통과하지 못한 자본은 국경 너머로 나아가지 못하고 발이 묶인다. 오늘날 전 세계를 뒤흔드는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신대륙에서 엔비디아는 독점적 환전 창구 자리를 차지했다. 빅테크와 각국 정부가 아무리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더라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엔비디아가 발행하는 연산 화폐를 쥐지 못하면 인공지능 생태계 안에서 어떤 사업도 시작할 수 없다. 지난 8월 발표된 엔비디아의 분기 실적에서 확인된 75%의 매출총이익률은 제조업의 정상적인 납품 마진이 아니다. 인공지능 생태계로 진입하는 모든 자본에서 징수하는 일종의 통행세에 가깝다.
엔비디아는 이제 단순한 반도체 설계 회사의 경계를 넘어섰다. 실리콘밸리에서 엔비디아는 화폐 공급과 유동성을 관장하는 사설 중앙은행처럼 움직인다. 전통적인 중앙은행이 본원통화를 발행하고 기준금리를 정하는 방식과 닮았다. 엔비디아는 전 세계 데이터센터로 공급되는 최신 그래픽처리장치의 수량을 직접 배분한다. 거대 기술기업이 최신 칩을 몇만 장이나 확보할지는 시장의 가격 경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엔비디아 경영진의 전략적 판단에 좌우된다. 클라우드 스타트업이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지도 마찬가지다. 연산 자원이 극도로 귀해진 인공지능 경제에서 공급 배분 권한은 산업의 신용을 통제하는 발권력과 다름없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려 통화량을 조절하는 것처럼 엔비디아는 칩 출하량과 공급 순위를 조율하며 기술 기업들의 목줄을 쥐고 있다.
발권력을 쥔 중앙은행의 진정한 위력은 자본 순환 구조를 직접 설계하는 지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엔비디아는 자신이 발행한 연산 화폐를 회수하고 재투자하는 정교한 회전문 금융을 구축했다. 엔비디아가 보유한 현금성 자산과 유동성 금융상품은 지난 7월 말 기준 993억 달러에 달한다. 엔비디아는 993억 달러에 달하는 실탄을 바탕으로 자사 칩을 대량 구매하는 클라우드 스타트업과 인공지능 연구소에 직접 지분을 투자한다. 클라우드 서비스 기업인 코어위브에 막대한 자본을 투입했다. 고객사가 칩을 담보로 사모 대출 시장에서 자금을 차입하도록 신용도 보강해 준다. 심지어 고객사가 사들인 칩의 연산 용량이 시장에서 다 소화되지 못할 경우 엔비디아가 이를 다시 사주는 환매 약정까지 맺었다. 창구에서 돈을 빌려주고 그 돈으로 자사 제품을 사게 한 뒤 남은 재고까지 창구가 다시 사들이는 거대한 환류 체계를 가동하고 있다.
장비를 파는 회사가 고객에게 돈을 빌려주며 매출을 부풀리는 공급자 금융은 기술 역사에서 낯선 풍경이 아니다. 25년 전 닷컴 열풍이 절정에 달했을 때 미국 통신 장비 제조사인 시스코 시스템즈와 루슨트 테크놀로지는 통신 스타트업에 수십억 달러의 구매 자금을 대출해주며 네트워크 장비를 팔았다. 통신망 수요가 무한히 팽창할 것이라는 낙관론 속에 광섬유 케이블이 땅속에 깔렸다. 하지만 정작 통신 트래픽의 유료화는 기대를 밑돌았다. 결국 신흥 통신사들이 줄파산하면서 시스코 시스템즈는 2001년 5월 재무제표에서 22억 5,000만 달러 규모의 재고 자산을 손실 처리해야 했다. 오늘날 엔비디아는 과거 통신 장비 제조사들과 체급과 위상이 크게 다르다. 과거 시스코 시스템즈가 단순한 외상 거래로 회계상 매출을 채우다 대규모 부실을 떠안았다면, 엔비디아는 75%의 매출총이익률과 1,000억 달러에 육박하는 현금 유동성을 방패로 세웠다. 스스로 시장의 최종 구매자이자 최종 대부자 역할을 겸하고 있다.
물론 시장 일각에서는 엔비디아의 순환 구조를 혁신을 뒷받침하는 불가피하고 영리한 생태계 전략으로 평가한다. 인공지능 기반 시설을 구축하는 데는 전례 없는 규모의 초기 고정자본이 소요된다. 상업은행이나 전통 채권시장은 데이터센터 자산의 미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 인공지능 반도체의 감가상각과 기술 수명을 가장 잘 이해하는 선도 기업이 유동성을 공급하고 위험을 분담해 초기 시장의 병목을 뚫어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빅테크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와 아마존은 올해에만 수백억 달러의 자본 지출을 단행하며 엔비디아의 생태계를 지탱하고 있다. 막대한 영업현금을 창출하는 엔비디아의 재무 건전성은 어떤 단기 침체도 버텨낼 만큼 두텁다는 신뢰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발권 은행이 유동성의 최종 보증인을 겸할 때 금융 시스템은 치명적인 연쇄 부실 위험에 노출된다. 엔비디아의 가장 공격적인 고객사인 코어위브의 총부채는 2025년 말 210억 달러에서 올해 6월 말 350억 달러로 급증했다. 코어위브의 부채는 오직 엔비디아 칩의 중고 가격이 유지되고 고성능 연산 수요가 끊이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 얹혀 있다. 파이낸셜타임스 집계에 따르면 주요 빅테크들이 인공지능 스타트업 지분 가치를 평가해 재무제표에 반영한 평가이익만 최근 분기 1,600억 달러를 넘어섰다. 만약 인공지능 서비스의 실질적인 수익화가 지체돼 소프트웨어 판매 대금이 데이터센터 감가상각비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면 담보 사슬은 급격히 흔들린다. 연산 단가가 꺾이는 순간 스타트업의 차입금 상환 능력이 무너진다. 고객사의 부실은 순환 출자망을 타고 고스란히 엔비디아의 재무제표로 되돌아온다.
엔비디아의 환전 창구 바깥에서 판을 지켜보는 한국의 처지는 위태롭기 짝이 없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의 화폐 발행에 들어가는 핵심 원자재인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3E)를 공급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이는 기축통화 시스템에 금괴를 납품하는 하청 공급자의 호황에 지나지 않는다. 독자적인 신경망처리장치(NPU) 생태계를 표방하며 정부 국민성장펀드로부터 2,500억원을 유치한 리벨리온조차 마찬가지다. 해외 진출의 활로를 뚫기 위해 지난 8월 엔비디아 본사를 찾아가 협력을 타진해야 했다. 해남 솔라시도에 5만 장의 가속기를 투입하겠다는 80메가와트 규모의 국가AI컴퓨팅센터 사업 역시 막대한 재정을 들여 엔비디아 환전 창구에 입장료를 치르는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독자적인 화폐를 세우지 못한 채 외국의 단일 창구에 의존하는 한 한국 인공지능 산업의 운명은 산타클라라 본사의 배분 정책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다.
엔비디아가 세운 사설 중앙은행의 지속 가능성을 검증할 지표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코어위브를 비롯한 전문 클라우드 기업들이 조달하는 사모 부채의 차환 금리와, 2차 임대 시장에서 형성되는 가속기의 시간당 대여 단가 추세다. 대여 단가가 하락세로 돌아서고 부채 차환에 웃돈이 붙기 시작한다면 엔비디아가 설계한 담보 사슬에 균열이 생겼다는 신호다. 둘째는 주요 빅테크의 공시 자료에서 인공지능 지분 투자로 인한 미실현 평가이익을 제외한 순수 인공지능 클라우드 서비스의 영업현금 창출 능력이다. 지분 평가로 부풀린 회계상 숫자를 걷어내고 실수요자의 유료 결제에서 발생하는 현금이 데이터센터 투자 비용을 회수하지 못한다면 자본의 회전문은 멈춰 설 수밖에 없다.
국경의 환전 창구는 해당 영토의 화폐를 받아줄 상점과 공장이 건재할 때만 문을 열어둘 수 있다. 창구 안쪽에서 아무리 화려한 화폐를 발행하고 스스로 대출을 놓아주며 환매를 약속하더라도 마찬가지다. 화폐로 지불할 실물 생산성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가치는 결국 바닥을 드러낸다.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신대륙에서 엔비디아가 구축한 환전 창구 역시 스스로 판돈을 대주고 제품을 사들이는 영구기관일 수는 없다. 엔비디아는 8월 27일 분기 실적 발표를 통해 이사회에서 500억 달러 규모의 추가 자사주 매입을 승인했다고 공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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