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흐름
540억달러 넣은 은행 금고, 국가 부실의 보관소로
8대 국유 금융사에 3600억위안 자본 수혈...지방정부 부채 떠안아 마진 1.5% 추락, 韓 상생금융 압박과 판박이

은행 지하에 설치된 두꺼운 강철 금고의 둥근 문이 돌아가며 열린다. 은행 금고는 예금자의 돈을 보관하고 건전한 기업에 빌려줄 자본을 쌓아두는 곳이다. 그런데 9월 초 베이징의 대형 국유 상업은행 금고에는 평소와 다른 돈이 흘러들었다. 중국 재정부와 정부계 투자회사들이 3,600억 위안(약 540억 달러)에 달하는 1급 자본을 은행 금고에 밀어 넣었다. 겉으로는 경기 침체를 막고 실물 대출을 늘리기 위한 자본 확충을 내세웠지만 금융시장의 반응은 차갑게 식었다. 증자 계획이 공개된 직후 중국 최대 상업은행 공상은행과 농업은행의 주가는 일제히 떨어졌다. 시장은 이 거대한 수혈이 은행의 곪은 상처를 가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수혈의 세부 내역은 이례적일 만큼 신속하게 확정됐다. 9월 6일 국유 대형 은행 중국공상은행은 1,000억 위안의 제3자 배정 유상증자 계획을 공시했다. 같은 날 농촌 금융을 맡은 중국농업은행도 1,600억 위안 규모의 유상증자 결정을 함께 발표했다. 중국 재정부가 2,000억 위안을 출자한다. 담배 전매 회사인 중국연초총공사 등이 600억 위안을 보탠다. 정책은행인 수출입은행과 국유 보험사의 출자금까지 합쳐 총 3,600억 위안의 1급 자본이 모인다. 중국 정부가 특별국채까지 발행해 금융기관의 핵심 자본을 직접 늘려준 것은 수십 년 만이다. 국유은행의 자본 확충은 손실 흡수 능력을 보강해 금융 안정을 지키는 핵심 안전판이다. 하지만 이번에 투입된 540억 달러는 400조 위안을 웃도는 상업은행 총자산의 0.1%에도 미치지 못한다. 상업은행의 순이자마진은 1.54%까지 떨어져 감독 당국의 건전성 기준선인 1.80%를 이미 밑돌고 있다.
자본 투입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28년 전 역사를 돌아봐야 한다. 1998년 8월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주룽지 총리가 이끌던 중국 정부는 특별국채를 발행했다. 2,700억 위안의 국채 자금이 4대 국유은행에 곧장 투입됐다. 이듬해에는 신다와 화룽 등 4대 자산관리공사를 세웠다. 은행 대차대조표에 쌓여 있던 1조 4,000억 위안의 부실채권을 액면가로 사들여 정리했다. 당시 투입된 국채 자금 2,700억 위안은 중국 국내총생산의 3.2%에 달하는 대규모 구조조정이었다. 개혁의 핵심은 은행 금고에서 국가의 부실을 덜어내 독립된 상업은행으로 세우는 데 있었다. 부실을 털어낸 은행들은 바젤 자본 규제를 충족했고 홍콩과 상하이 증시에 상장하며 세계 최대 금융회사로 도약했다.
올가을의 자본 투입은 28년 전과 정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28년 전에는 은행에서 국가의 부실을 떼어냈지만 지금은 국가의 부실을 은행 안으로 밀어 넣고 있다. 중국 정부는 수년째 이어진 부동산 거품 붕괴와 60조 위안에 달하는 지방정부 융자플랫폼 부채를 재정으로 직접 해결하지 않았다. 대신 은행들을 동원해 미분양 아파트 매입 자금을 대는 화이트리스트 대출을 늘리고, 만기가 돌아온 지방채를 초장기 저금리 대출로 차환하도록 지시했다. 은행이 지방정부와 부동산 개발사의 손실을 대신 흡수하는 방파제 역할을 떠안았다. 그 결과 은행의 건전성 지표가 갉아먹히자 뒤늦게 자본을 채워 넣는 사후적 땜질이 이어지고 있다.
물론 정책 당국의 계산은 다르다. 금융당국은 은행의 1급 자본이 3,600억 위안 늘어나면 자기자본비율 규제 아래서 대출 여력이 수조 위안 단위로 커질 수 있다고 본다. 1위안의 자본이 약 10위안의 신규 대출을 일으키는 금융 레버리지를 고려할 때 이번 조치가 자금난에 빠진 제조업과 첨단 산업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마중물이 된다는 설명이다. 은행이 대출 문턱을 낮추면 민간의 설비투자와 주택 소비가 살아나고 경기 반등이 다시 은행의 부실 위험을 낮추는 선순환이 일어날 것이라는 관측도 뒤따른다. 관영 매체들이 연일 이번 증자를 경기 부양의 신호탄으로 띄우는 배경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측은 지금 중국 경제를 짓누르는 병의 실체를 놓치고 있다. 지금 중국의 문제는 은행의 대출 여력이 바닥난 데 있지 않다. 돈을 빌려 사업을 벌일 주체가 시장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실제로 중국의 위안화 대출 증가율은 7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주저앉았다. 부동산 가격 폭락을 겪은 가계는 빚을 내 집을 사지 않고 저축을 늘린다. 민간 기업은 공장을 짓는 대신 빚을 갚는 대차대조표 불황에 갇혀 있다. 여기에 중앙은행의 거듭된 금리 인하와 기존 주택담보대출 금리 인하 강제로 은행의 수익성은 역사적 바닥으로 추락했다. 은행이 확보한 새 자본은 민간의 혁신 투자처로 흘러가지 못하고 지방정부의 만기 채무를 돌려막고 멈춰 선 공사 현장을 떠받치는 데 묶인다.
은행을 국가 재정의 출납창구로 다루는 방식은 금융 시스템 전체의 가격 기능을 훼손한다. 은행의 본래 역할은 위험을 정밀하게 평가해 자본의 가격을 결정하는 데 있다. 하지만 국가가 은행 대차대조표를 준재정 수단으로 징발하면 신용의 정상적인 배분은 멈춘다. 수익을 내지 못하는 좀비 공기업과 지방 플랫폼이 저리 대출을 독점하는 사이 정작 자금이 절실한 민간 혁신 기업은 대출 창구에서 밀려난다. 이번 자본 확충 대상에 중국인수와 중국인민보험을 비롯한 국유 보험사들까지 처음으로 포함된 사실은 위기의 깊이를 드러낸다. 초저금리로 운용 수익률이 급락하자 보험사의 지급여력까지 무너지며 금융 시스템 전체가 국가 부실을 분담하는 거대한 공동 수조로 묶였다.
은행을 정부의 우회 금고로 끌어다 쓰는 모습은 바다 건너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 금융시장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정부가 건전재정 기조를 유지하며 취약계층 복지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정리를 국가 예산으로 감당하지 않는 사이 그 부담은 시중은행의 대차대조표로 넘어왔다. 금융당국은 올해 초부터 포용금융 대전환을 내세워 5대 시중은행에 2조원대 상생금융 출연을 요구했고 포용금융최고책임자(CIFO) 직책 도입까지 압박했다. 이에 따라 5대 은행의 올해 상반기 서민대출 집행액은 2조 6,170억원에 달했다. 지난해 하반기보다 1조원 넘게 늘어나며 연간 목표치의 71.8%를 이미 달성했다.
정부가 직접 져야 할 정책 부담을 민간 금융회사에 떠넘기면서 자산 건전성에는 경고등이 켜졌다. 올해 1분기 5대 은행의 새희망홀씨 대출 연체율은 1.41%로 일반 신용대출 연체율인 0.31%의 네 배를 웃돌았다. 저축은행과 같은 제2금융권이 감당해야 할 고위험 차주를 시중은행이 떠안으면서 잠재적 부실 위험은 은행 예금자와 주주에게 고스란히 넘어가고 있다. 부동산 PF 연착륙 과정에서도 은행권은 수조 원 규모의 정상화 펀드 출자와 신용보증기금 유동화회사보증(P-CBO) 인수를 떠안으며 방파제 역할을 도맡아야 했다. 재정 적자를 가리기 위해 은행의 건전성을 헐어 쓰는 구조는 서울과 베이징이 궤를 같이한다.
은행 지하에 설치된 두꺼운 강철 금고의 둥근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다. 그 금고는 이제 시장의 신용을 평가하고 성장을 이끄는 자금의 저수지 역할을 상실했다. 540억 달러의 자본 수혈은 국가의 부실 채권과 지방정부의 빚문서를 더 많이 보관하도록 금고의 선반을 넓혀준 조치에 가깝다. 주인이 떠넘긴 부실의 무게에 짓눌린 금고 안에서는 새로운 부가가치가 자라나지 못한다. 4분기 시장 참여자들은 국유은행의 신규 대출 총량 대신 상업은행 순이자마진의 바닥 확인 여부와 지방채 차환 금리의 추이를 주시해야 한다. 금융감독을 총괄하는 국가금융감독관리총국은 오는 10월 중순 3분기 상업은행 자산 건전성 지표와 부실채권 비율을 공식 집계해 발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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