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화재 때 멈추라던 지침...유로터널은 전속력 질주 택했다
2008년 화물 열차 화재로 반년 마비...환풍기가 불 키우자 방재 정거장 신설

2008년 9월 11일 오후 영국 포크스턴을 떠난 유로터널 화물 셔틀 열차가 해저 구간을 달리고 있었다. 프랑스로 향하던 열차 안에서 날카로운 폭발음이 터졌다. 화물칸에서 번져 나온 불길은 순식간에 짙은 그을음을 뿜으며 객차를 덮쳤다. 열차가 비상 정차하면서 실내 조명이 일제히 꺼졌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숨 막히는 열기가 밀려들었다. 트럭 기사들과 승무원은 짙은 연기를 뚫고 비상구를 열어 중앙 서비스 통로로 간신히 몸을 피했다. 바다 밑바닥에 갇힌 불길은 밤새 꺼지지 않았고 내부 온도는 1,000도까지 올라갔다.
이 불로 터널 북쪽 구간이 심각하게 파손됐다. 녹아내린 콘크리트 덩어리가 선로 위로 쏟아졌고 내벽을 지탱하던 철근은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영국과 유럽 대륙을 잇는 단일 물류 통로가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유로터널은 무너져 내린 터널 벽면을 특수 콘크리트로 보강하는 복구 공사에만 6,000만파운드를 썼다. 복구 작업으로 터널 한쪽이 반년 동안 폐쇄되면서 열차 운행량은 평소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물류가 끊기면서 유로터널이 떠안은 운행 손실만 1억8,500만파운드에 달했다.
화재 당시의 안전 규정이 피해를 키웠다. 당시 철도 매뉴얼은 터널 안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열차를 즉시 세우고 고출력 환풍기를 돌려 연기를 배출하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바다 밑 깊숙한 터널로 소방대가 진입하기까지는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소방대를 기다리는 동안 멈춰 선 열차 위에서 돌아간 환풍기는 연기를 내보내기는커녕 불길에 산소를 퍼붓는 거대한 송풍기가 되었다. 여기에 화물차를 실은 화물칸이 바람이 통하도록 뚫린 철망 구조인 탓에 외부 공기가 거센 불길을 더 키웠다. 화재가 발생하면 열차를 세운다는 오랜 상식이 해저 터널을 거대한 불가마로 만든 꼴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합동 조사위원회는 터널 한가운데 멈춰 서서 외부 구조대를 기다리는 방식으로는 대형 화재를 막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조사를 마친 유로터널은 방재 설계를 근본부터 바꿨다. 불이 났을 때 열차를 멈추는 대신 화재 진압 장비를 갖춘 안전 구역까지 열차가 계속 달리도록 운행 방식을 바꿨다. 유로터널은 터널 중간 지점 네 곳에 화재 진압 전용 지하 정거장을 새로 짓기 시작했다.
새 시스템에서 열차는 불길이 번져도 멈추지 않는다. 화재 경보가 울리면 기관사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가장 가까운 방재 정거장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린다. 방재 정거장 구간에는 고압 물 분사 장치가 터널 벽면과 천장을 따라 촘촘히 설치돼 있다. 열차가 정거장에 들어서는 순간 노즐에서 뿜어낸 고압 물안개가 불길을 에워싸 산소를 차단한다. 그사이 승객들은 연기가 닿지 않는 격리 통로를 통해 외부로 빠져나간다. 화재가 나면 안전 설비가 갖춰진 방재 정거장까지 곧장 달리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유로터널은 2012년 1월 네 번째 방재 정거장의 소화 설비 시험을 마치고 이 시스템의 상업 운용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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