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흐름
공짜 차용증의 시대는 끝났다...나랏빚 덮친 5% 국채금리의 역습
미국 30년물 5.3% 급등, 한국 국고채 4.7% 육박...821조 슈퍼예산과 차환 부담 마주한 나랏빚의 경고음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의 채권 전광판에는 국채 금리가 연일 붉은 숫자를 나타내고 있다. 국채는 본질적으로 정부가 미래 세수를 담보로 투자자에게 건네는 국가의 차용증서다. 국채금리는 정부가 재정을 꾸리기 위해 빚을 낼 때 치러야 하는 조달 비용이자, 금융시장의 모든 대출금리와 투자 수익률을 결정하는 기준이다. 지난 15년간 세계 각국 정부는 이 차용증을 비용 없는 백지수표처럼 다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시작된 초저금리와 양적완화가 출발점이었다. 각국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0%로 낮췄고, 시중에 풀린 막대한 유동성은 정부가 발행한 국채로 거침없이 흘러들었다. 나랏빚을 아무리 많이 늘려도 이자 부담이 거의 생기지 않는 기이한 환경이 10년 넘게 이어졌다.
유럽에서는 돈을 빌리는 정부가 이자를 주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채권 매수자에게 보관 비용 명목의 웃돈을 받는 마이너스 금리 국채까지 버젓이 시장에서 소화됐다. 빚을 내는 데 비용이 든다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 시기였다. 학계 역시 빚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론적 명분을 보탰다.
경제성장률이 국채 금리보다 높으면 경제가 성장하면서 세수가 늘어나 나랏빚은 가만히 두어도 저절로 줄어든다는 가설이 학계와 정책 당국의 정설처럼 받아들여졌다. 정부가 국채를 대거 발행해 경기 부양과 복지에 투입해도 재정 위기는 오지 않는다는 믿음이 지배했다. 미국은 연방정부 부채를 40조달러까지 늘렸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국채 잔액은 61조달러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차용증 액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도 누구 하나 만기를 걱정하지 않았다.
영원할 것 같던 무이자 잔치는 인플레이션의 귀환과 함께 끝이 났다. 공급망 교란과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물가가 치솟자 중앙은행들은 서둘러 금리 인상에 나섰다. 하지만 진짜 균열은 기준금리가 오른 뒤에 찾아왔다. 인플레이션이 한풀 꺾였는데도 장기 국채금리는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치솟기 시작했다.
지난 10일 미국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연 4.97%까지 뛰어올랐고 만기가 더 긴 30년물 금리는 연 5.38%를 기록하며 19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국채 발행 시장에서도 자금 조달 비용이 폭등했다. 미국 재무부가 실시한 229억달러 규모의 30년 만기 국채 입찰에서 낙찰 금리는 연 5.308%를 기록해 2001년 이후 25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유럽과 일본의 국채 시장도 일제히 요동쳤다. 영국 30년 만기 국채금리는 연 5.93%로 치솟았고 프랑스 30년물 금리도 연 5.10%로 올라섰다. 오랜 기간 마이너스 금리에 머물던 일본 10년물 국채금리도 연 3.04%를 넘어서며 3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투자자들이 요구하는 기간 프리미엄이 부활하면서 금리를 밀어 올렸다. 장기 채권을 만기까지 보유할 때 따르는 물가 불안과 재정 건전성 악화 위험에 대해 채권 시장이 정당한 대가로 웃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나랏빚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불어난 상황에서 정부가 예전처럼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리려 들자 투자자들은 국채를 내다 팔며 맞섰다. 정부의 방만한 재정 운용을 국채 매도로 응징하는 채권 자경단이 세계 금융시장의 전면에 다시 등장했다.
여기에 민간 기술 기업과의 자금 조달 경쟁까지 겹쳤다. 인공지능 인프라 구축에 나선 기술 기업들이 높은 금리를 제시하며 수십조원 단위의 회사채를 공격적으로 발행하고 있다. 전 세계 장기 투자 자금은 한정돼 있는데 국채를 무제한으로 발행하는 정부와 데이터센터를 짓는 빅테크가 이 자금을 놓고 치열하게 다툰다. 민간 기업의 막대한 자금 수요는 국채가 누려온 안전자산 프리미엄을 잠식하며 국채금리를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
과거 저금리 시절에 조달한 부채의 만기가 대거 돌아오는 차환 부담은 더 큰 위기다. 만기가 된 국채를 상환하려면 새 국채를 발행해 기존 빚을 차환해야 하는데 0%대 금리로 조달했던 국채를 연 5%가 넘는 새 국채로 갈아타는 순간 정부의 이자 비용은 곱절로 뛴다. 미국의 한 해 국채 순이자 지출만 이미 1조달러를 넘어서며 국방비를 추월했다. 과거의 빚을 갚기 위해 더 비싼 빚을 내야 하는 부채의 악순환이 시작됐다.
물론 재정 확장을 옹호하는 쪽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저성장의 늪을 극복하려면 정부가 빚을 내서라도 인공지능, 첨단 반도체, 미래 인프라에 선제적으로 투자해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국가 주도의 대규모 전략 투자가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면 장기적으로 세입 기반이 확충돼 늘어난 나랏빚을 원활하게 갚는 선순환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50% 안팎으로 주요 선진국보다 낮은 만큼 국채를 더 발행할 여력이 충분하다는 설명도 보탠다.
하지만 이런 낙관론은 금리가 성장률보다 한참 낮았던 과거의 공식에 갇혀 있다. 자금 조달 금리가 경제성장률을 웃돌면 빚은 성장의 열매를 갉아먹는 족쇄가 된다. 정부가 씀씀이를 줄이지 않고 시장에 대규모 국채 물량을 계속 쏟아내면 채권 시장은 요구 수익률을 높여 국채 가격을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응수한다. 늘어난 세수로 원금을 갚기는 고사하고 매년 불어나는 이자를 치르기 위해 또 다른 차용증을 써야 하는 처지에 몰린다.
이 냉혹한 시험대는 한국 경제에도 그대로 닥쳐왔다. 정부는 내년도 예산안을 821조원으로 편성하며 올해보다 씀씀이를 대폭 늘렸고 반도체 호황으로 늘어난 세수에 기대어 162조원 규모의 미래대응기금까지 신설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국가채무는 지난해 1304조원을 돌파한 데 이어 내년에는 1519조원까지 불어날 전망이다. 불과 7년 만에 나랏빚이 두 배로 늘어나는 가파른 속도다.
국내 채권 시장은 이미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서울 채권시장에서 국고채 30년물 금리는 연 4.70% 안팎까지 치솟으며 올 들어서만 1.4%포인트 넘게 뛰었는데 상승 폭만 놓고 보면 주요 기축통화국보다 가파르다. 정부가 한 해 치러야 할 국채 이자비용만 지난해 28조원을 넘어섰고 앞으로 해마다 수조 원이 늘어날 상황이다. 나랏빚 이자를 치르느라 정작 필요한 복지와 투자 예산이 줄어드는 긴축의 역설이 현실로 다가왔다.
불똥은 민간 경제로 번지고 있다. 국채금리 상승은 주택담보대출과 회사채 금리를 곧바로 밀어 올린다. 지난달 은행권 주택담보대출을 4조 3,000억원 늘린 가계는 치솟는 대출 이자에 짓눌리고 있다. 미국 국채금리가 떨어질 것으로 보고 2조 5,000억원의 미국 장기 국채를 사들였던 국내 개인 투자자들도 막대한 손실을 떠안았다. 나랏빚이 공짜라는 착각이 낳은 청구서가 국민 개개인의 계좌로 날아들고 있다.
다음 분기에 지켜볼 지표는 국고채 30년물 입찰의 응찰률과 미국 재무부의 분기 국채 발행 계획이다. 장기 국채 입찰에서 응찰률이 떨어지며 금리가 5% 선에 굳어지는지, 아니면 재정 당국이 국채 물량을 감당하지 못해 만기 1년 미만의 단기 국채로 차환을 메우기 시작하는지가 무이자 나랏빚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다. 정부의 차용증에 찍힌 이자율은 냉정한 현실로 복귀했다. 시장은 더 이상 공짜 차용증을 용인하지 않는다.
기획재정부는 오는 10월 14조원 규모의 국고채를 경쟁입찰 방식으로 발행한다. 이 가운데 30년 만기 초장기물 배정액은 3조 6,000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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