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세상의 흐름

나랏빚 40조달러에 밀려난 중앙은행...75년 만에 흔들리는 "빗장"

트럼프 대통령의 금리 인하 압박과 40조달러 나랏빚...821조 슈퍼예산 앞에 선 중앙은행 독립성의 위기

리지

중앙은행5분

1951년 1월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연방준비제도 정책위원 전원을 백악관 집무실로 불렀다. 한국전쟁 발발로 군비 지출이 73% 급증하고 물가가 8% 넘게 치솟자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국채금리를 인위적으로 낮게 묶어 두라고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연준은 2차 대전 전비 마련을 위해 단기 국채는 연 0.375%, 장기 국채는 연 2.5% 상한선에 맞춰 시장의 매물을 무제한으로 사들여야 했다. 서슬 퍼런 요구에 맞서 토머스 맥카비 연준 의장은 사임으로 버텼다.

두 달 뒤인 1951년 3월 연준과 재무부는 역사적인 합의를 발표했다. 재무부는 통화정책에 개입하지 않고, 연준은 정부 빚을 대신 떠안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정부의 지출 욕망과 중앙은행의 화폐 발행 사이에 제도적 "빗장"을 걸어 잠근 계기였다.

중앙은행이 정부의 자금 창구 노릇을 멈추고 독자적인 금리 결정으로 화폐 가치와 물가를 방어하는 현대 통화정책의 시대가 그렇게 열렸다. 75년간 이 원칙은 자본주의 금융 질서의 가장 견고한 상식으로 작동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인플레이션을 막아서는 최후의 방파제처럼 여겨졌다.

영원할 것 같던 상식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서서히 흔들렸다. 기준금리를 0%로 낮춘 중앙은행들은 양적완화라는 이름으로 정부 국채를 대거 사들이기 시작했다. 정부가 빚을 내면 중앙은행이 화폐를 찍어 국채를 받아주는 구조가 자리 잡았다.

나랏빚을 아무리 늘려도 금리가 오르지 않는 초저금리 환경이 10년 넘게 이어지자 정치권은 중앙은행의 권능을 비용 없는 무한 조달 창구로 여기게 됐다. 재정과 통화를 가르던 "빗장"은 걸려 있었으나 누구도 그 경계를 의식하지 않았다. 빚을 내는 데 대가가 따르지 않는다는 착각이 세계를 지배했다.

공짜 점심의 시간은 인플레이션의 복귀와 함께 끝이 났다. 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리자 그동안 쌓아 올린 천문학적 부채의 차환 비용이 폭발했다. 미국의 연방정부 부채는 40조달러에 도달했고 나랏빚을 갚기 위해 지출하는 순이자 비용만 연간 1조달러를 넘어섰다.

미국 재무부가 9월 실시한 30년 만기 국채 입찰에서 낙찰 금리는 연 5.308%까지 치솟았다. 2001년 이후 최고치로 229억달러 규모의 물량이 채권시장에서 힘겹게 소화됐다. 10년 만기 국채 금리도 4.8% 안팎으로 뛰며 연방정부 재정을 한계로 몰아넣고 있다. 발행 비용의 급등은 고스란히 납세자의 이자 부담으로 쌓인다.

이자 청구서가 예산을 위협하자 백악관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연준을 향해 연일 금리 인하를 요구하며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금리가 낮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가 성장할 때는 금리를 올릴 이유가 없다는 논리다.

지난 5월 취임한 케빈 워시 연준 의장이 잭슨홀에서 물가 안정을 위한 추가 긴축 가능성을 시사하자 백악관은 무역 보복까지 거론하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75년 전 트루먼 대통령이 연준 정책위원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모았던 역사가 되살아난 모양새다.

압박은 거친 말에 그치지 않는다. 미국 재무부는 장기 국채금리를 누르기 위해 국채 바이백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만기 1년 미만의 단기 채권인 재정증권 발행 비중을 급격히 늘렸다. 단기 채권 조달을 늘려 장기 금리 상승을 억누르고 시중 유동성을 조절하는 일은 본래 중앙은행이 맡아온 공개시장 조작 영역이다.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외환시장 개입까지 시사하며 통화 당국의 영역을 직접 침범했다. 정부가 직접 유동성 조절에 나서면서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경계선이 급속도로 지워지고 있다.

태평양 건너 한국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정부는 내년도 예산으로 821조원에 달하는 역대 최대 규모의 슈퍼 예산을 편성했다. 올해보다 10% 이상 지출을 늘리는 확장 재정 기조다. 반도체 수출 호황에 따른 일시적 세수 증가를 발판 삼아 씀씀이를 키우고 있지만 고령화로 늘어난 의무지출을 줄이기 어려운 탓에 나랏빚 증가세는 가파르다.

국가채무의 증가 속도는 이미 위험 수위를 넘나든다. 국가채무는 작년 한 해에만 129조원 늘어 1,300조원을 돌파했고 올해 말에는 1,412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나랏빚 이자로만 지난해 28조원이 넘는 세금이 국고에서 빠져나갔다.

물가와 금융 안정을 책임진 한국은행은 정반대 방향으로 달린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지난 8월 기준금리를 두 달 연속 0.25%포인트 인상해 연 3.00%로 끌어올렸다. 2,000조원에 육박한 가계부채와 수도권 집값 불안을 차단하기 위한 긴축 행보다.

신현송 한은 총재는 기자간담회에서 추가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을 열어두고 물가 안정을 강조하며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아선 안 된다"고 밝혔다. 정부는 821조원을 시장에 풀며 가속 페달을 밟고, 중앙은행은 금리를 올려 브레이크를 밟는 모순된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정부의 지출 확대는 시중 유동성을 늘려 물가를 자극하고 이는 다시 한은의 추가 금리 인상을 부르는 악순환을 낳는다. 이미 채권시장에서는 30년 만기 국고채 금리가 연 4.7% 안팎까지 치솟았다. 정부의 씀씀이가 커질수록 시장 금리가 뛰어 민간 투자를 위축시키는 구축 효과가 본격화하고 있다.

더 심각한 균열은 물밑에서 일어난다. 정부는 세입과 세출의 시차로 자금이 부족할 때마다 중앙은행의 당좌대월을 통해 자금을 빌려 쓴다. 중앙은행의 권한과 책임을 명시한 법률인 한국은행법 제75조에 규정된 대정부 일시차입 제도다.

정부가 한국은행에서 돈을 빌려 쓰는 대정부 일시차입금은 본래 회계연도 안의 일시적 세입 결손을 메우는 단기 수단이다. 하지만 대규모 세수 부족이 되풀이되자 정부는 이를 국회 통제를 피하는 마이너스통장처럼 써왔다. 국회의 예산 심의를 거치지 않고 중앙은행의 발권 권한에 기대어 재정을 집행하는 관행이 번졌다.

물론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법률과 제도로 굳건히 보장돼 있다는 반론도 있다. 미국 연준 이사의 14년 임기 보장이나 한국은행법 제3조의 중립성 명문화는 정권의 외풍을 막아내는 제도적 안전판이다. 실제로 한은 금통위는 정부의 확장 재정과 무관하게 두 달 연속 기준금리를 올렸다.

하지만 법률적 독립성은 나랏빚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 있을 때만 작동하는 허구에 가깝다. 국가 부채가 임계치를 넘어서면 통화정책이 재정에 종속되는 "재정 지배(fiscal dominance)"가 시작된다. 부채와 이자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정부가 감당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면 파산을 피하기 위해 중앙은행의 대차대조표를 강제로 동원할 수밖에 없다.

결국 부채가 지나치게 많아진 세상에서 중앙은행은 진퇴양난에 빠진다.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면 정부의 이자 부담이 폭증해 채권시장이 흔들리고, 금리를 억누르면 인플레이션이 화폐 가치를 갉아먹는다. 독립성의 외피는 유지될지 몰라도 정책의 실질은 재정의 인질로 전락하고 만다.

앞으로 독자가 지켜볼 지표는 두 가지다. 첫째는 미국 재무부의 단기 채권 발행 비중과 국채 바이백 집행 규모다. 재무부가 장기 금리를 낮추기 위해 단기 채권 조달을 늘리고 국채 매입을 확대하는 것은 재정이 통화 공급의 주도권을 쥐려는 신호다.

둘째는 한국은행의 대정부 일시차입금 누적 잔액과 국고채 단순매입 재개 여부다. 화폐를 발행하는 권한은 본래 물가 안정을 위해 절제되어야 한다. 정부가 국채 발행 부담을 피해 한은의 발권 권한에 얼마나 손을 뻗치는지, 그리고 한은이 국채 시장 안정을 이유로 채권을 직접 사들이는 시점이 언제인지가 독립성을 가늠할 최후의 보루다.

75년 전 백악관의 밀실에서 트루먼의 호통을 버텨내며 지켜냈던 통화정책의 "빗장"은 이제 천문학적인 국가 부채와 차환 압박에 밀려 내부에서부터 헐거워지고 있다. 정부의 씀씀이가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가장 먼저 떨어져 나가는 장식품에 그친다. 미국 재무부는 30년 만기 국채를 연 5.308%에 발행했다.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연 3.00%로 높인 뒤 정부 일시차입금 한도를 50조원으로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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