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세상의 흐름

SK하이닉스 미국 팹 임차 검토...트럼프 관세 피하려다 40년 원가 깨진다

인텔 미완공 공장 임차 협의...고비용 구조와 기술 유출 우려 속 1996년 유진 공장의 실패 재연 시험대

리지

SK하이닉스 미국 공장5분

Illustration by Gemini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 외곽의 공업 도시 뉴올버니의 허허벌판, 인텔이 골조만 올리다 공사를 멈춘 반도체 팹 부지 주변에 회색 가림막이 둘러쳐져 있다. 현장 입구에는 녹슨 철제 펜스와 멈춰 선 노란색 기중기가 흙먼지를 맞으며 서 있고, 클린룸으로 들어가는 에어샤워실 입구 옷걸이에는 먼지 한 톨을 막는 작업복인 흰색 "방진복"이 걸릴 자리만 덩그러니 비어 있다.

이 버려진 공사장에 SK하이닉스가 발을 들이려 한다. 인텔이 짓다 만 오하이오 팹의 클린룸을 빌려 메모리 반도체 전공정 시설을 구축하는 방안을 협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웨이퍼에 회로를 새기는 전공정 라인을 미국 본토에 세우겠다는 구상이다. 미국 정부의 관세 압박에 떠밀려 40년간 한국 땅을 지켰던 핵심 제조 거점을 태평양 너머로 옮기는 위험한 도박이 시작된 셈이다.

반도체 제조에서 전공정과 후공정의 거리는 하늘과 땅 차이다. SK하이닉스가 지난달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 착공한 시설은 웨이퍼를 자르고 쌓는 첨단 패키징 공장으로, 38억 7,000만달러를 들여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완성하는 이 공정에는 미국 정부도 4억 5,000만달러의 보조금을 약속했다. 패키징은 완제품을 고객사 바로 앞에서 조립해 납품하는 성격이 짙어 현지화의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웨이퍼 자체를 생산하는 전공정 팹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거대한 클린룸 안에서 수백 번의 노광과 식각, 증착을 거치는 전공정에는 막대한 전력과 초순수, 숙련 엔지니어 수천 명이 필요하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지난 40년간 이천과 청주, 화성과 평택이라는 고도로 집중된 제조 집적지에서만 D램 웨이퍼를 생산해 온 것도 이 때문이다. 협력업체와 기반 시설이 한곳에 밀집해 센트 단위의 원가를 깎아내는 클러스터의 저력이었던 것이다.

이 원칙을 깨려는 배경에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거친 통상 청구서가 있다. 미국 정부는 미국에서 생산하지 않은 반도체에는 10%에서 20%에 달하는 보편 관세를 물리겠다고 공언했고, 미 상무부는 미국에서 공사를 시작하지 않으면 세계 최대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경고했다. 여기에 한국 기업들에 요구하는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압박도 거세지고 있다.

인텔의 위기도 묘한 이해관계를 불렀다. 200억달러를 들여 미국 최대 팹을 짓겠다던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에서 누적된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오하이오 공사의 완공 시점을 2030년 뒤로 연기한 것이다. 뼈대만 남은 현장에 천문학적 유지비가 계속 빠져나가자 인텔은 공간을 빌려 쓸 세입자를 찾아 나섰고, SK하이닉스로서는 공장 건물만 빌려 초기 투자비를 아끼고 미국의 관세 칼날도 피할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든 셈이다.

30년 전에도 똑같은 비극을 겪었다. SK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는 1996년 미국의 반덤핑 관세를 극복하고 현지 시장을 선점하겠다며 오리건주 유진에 13억달러를 들여 전공정 팹을 착공했다. 한국 반도체 역사상 미국 본토에 세운 첫 번째 전공정 공장으로, 당시에도 관세를 피하고 세계 최대 IT 기업들의 수요를 현장에서 흡수하겠다는 계산이 앞섰던 것이다.

하지만 유진 공장의 결과는 처참한 실패였다. 미국 현지의 고임금 구조와 잦은 이직, 부품 조달 지연으로 공장의 수율은 한국 본토 수준을 따라가지 못했고, 1997년 외환위기와 글로벌 D램 가격 폭락이 덮치자 공장은 막대한 손실을 쏟아내는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결국 하이닉스(옛 현대전자)는 가동 10년 만인 2008년 9월 유진 팹을 영구 폐쇄하고 헐값에 매각했다. 미국 땅에서 전공정 D램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선택이었는지가 드러난 셈이다.

물론 미국 현지에 전공정 팹을 확보해야 한다는 반론에도 일리는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장벽이 현실화되면 한국산 메모리의 가격 경쟁력이 깎이고 미국 내 AI 공급망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인텔의 기존 팹을 임차하면 수조 원에 달하는 토목 공사비를 절감하고, 인디애나 패키징 팹과 인근 빅테크 데이터센터를 잇는 현지 완결형 유통망을 갖출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메모리 반도체 산업의 본질을 간과한 것이다. 주문에 따라 가격을 협상하는 맞춤형 파운드리와 달리 표준 규격 제품인 D램은 전 세계 시장에서 형성되는 단일 가격으로 거래된다. 부품 협력사와 반도체 공정용 특수가스 업체, 정밀 화학 공장이 1시간 거리에 포진한 한국 클러스터를 벗어나면 웨이퍼 한 장당 제조 원가는 최소 30% 이상 상승하게 된다. 관세를 면제받더라도 생산 비용이 관세를 문 한국산 제품보다 비싸지는 자가당착에 빠지는 셈이다.

제조 인력의 숙련도 역시 돈으로 살 수 없다. 미세 공정이 10나노급 이하로 내려오면서 D램 양산은 매일 수만 가지 공정 변수를 미세하게 조율하는 엔지니어들의 팀워크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공정 결함 하나를 잡기 위해 밤샘 토론을 벌이고 주말을 반납하는 한국 특유의 노동 규율을 미국 공장에서 기대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TSMC가 애리조나 팹에서 숙련공 부족과 현지 노조의 반발로 가동을 수년씩 미룬 사태가 오하이오에서도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국내 반도체 생태계의 출혈도 불가피하다. SK하이닉스는 경기도 용인 메가 클러스터에 120조원을 투입해 1기 팹을 짓고 청주 팹을 확장하는 초대형 계획을 진행 중이다. 미국 현지 팹을 빌려 설비를 채우고 첨단 노광장비를 분산 투입하면 국내 팹의 자금과 자원은 그만큼 분산될 수밖에 없고, 세계 메모리 시장 점유율 70%를 지탱해 온 국내 소부장 기업들의 일감도 바다 건너로 빠져나가게 된다.

제도적 장벽도 만만치 않다. 첨단 10나노급 D램 기술은 정부가 지정한 국가핵심기술이다. 해외에 전공정 팹을 지으려면 산업통상자원부 산업기술보호위원회의 엄격한 심사와 승인을 거쳐야 하는데, 정부가 미국 정부의 통상 압박에 밀려 국가핵심기술을 미국 기업의 부실 공장으로 넘기는 결정을 쉽게 내릴 리 없다.

앞으로 눈여겨볼 지표는 세 가지다. 첫째는 산업통상자원부의 국가핵심기술 해외 이전 심사 결과로, 정부가 오하이오 팹 임차를 허용할지 또 기술 유출 방지 조건을 어떻게 달지 지켜봐야 한다. 둘째는 미국 11월 중간선거 이후 트럼프 행정부의 실제 반도체 품목별 관세율 확정 여부다. 관세가 면제되더라도 현지 제조 원가 상승분을 상쇄할 수 있는지가 여기서 판가름 난다.

셋째는 경기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1기 팹의 설비 발주 속도다. SK하이닉스가 미국 투자로 인해 국내 클러스터의 자금 집행을 늦추거나 장비 반입을 미루는지 확인해야 한다. 만약 국내 팹의 완공이 지연된다면 미국 현지화가 본진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제로섬 거래라는 점이 수치로 드러나는 셈이다.

뉴올버니의 멈춰 선 공사장 앞에 놓인 현실은 30년 전 유진의 실패를 답습하는 위험한 선택이다. 40년간 한국 땅에서 축적한 제조 클러스터의 규율을 버리고, 단기적인 통상 압박을 피하려 무리하게 공장을 쪼개는 일이기 때문이다. 클린룸 문 앞에 걸린 흰색 "방진복"은 빈 건물을 빌린다고 저절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 옷을 채울 숙련 인력 수천 명과 거대한 협력업체망 없이 시작하는 공장 임차는 막대한 제조 비용만 남길 뿐이다. SK하이닉스는 17일 인텔의 미국 오하이오 반도체 공장 임차 방안을 협의 중이라고 확인했고, 메모리 반도체 전공정 시설을 미국 본토에 두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내용을 공식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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